기이하고도 거룩한 은혜
프레드릭 비크너
소제목 한 챕터를 멈추지 않고 읽어야 한다. 중간에 멈추면 이해하기 어려워진다. 1장에 나오는 두 단락 <고통의 문>과 <시간 이후>에는 좋은 문장이 가득하다. 2장은 비크너가 기억하는 할머니, 동생 이야기가 많다. <방 이름, ‘기억하라’>, <기억의 마법>, <기억의 고투>, <기억의 소망> 모두 기억을 다룬다. 내용은 아주 쉽다. 읽기는 쉬운데, 저자가 이걸 왜 썼는지 알기 어렵다. 딸은 2장이 너무 아름답다고 했다. 독서모임에 온 선생님은 2장을 왜 썼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고 했다. 2장은 짧은 단상이 이어진다. 하나하나 음미하기 좋은 내용이다. 소리 내서 읽으면 마음이 충만해진다.
비크너는 쉬운 듯 어렵다. 원제가 A crazy, holy Grace다. 은혜가 은혜로 보이지 않는다. 미친 듯한 모습으로 다가오는데 그 모습 가운데 거룩함이 있다고 한다. 그걸 볼 눈이 있다면 일상은 은혜로 가득하다. 비크너는 할머니와 동생을 기억하며 A crazy, holy Grace를 만난 것 같다. 읽고 또 읽을 책이다.
<<책에 나오는 문장들입니다.>>
잃은 것은 찾은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네.
지금까지 있었던 죽음을 다 더해도
생명 옆에 놓으면 잔 하나 채우기에도 부족한 것일게.
→ 좋은 청지기로 살아오셨네요. 고통의 좋은 청지기로 살아오셨어요.
→ 여러분이 누구이든, 운이 좋든 나쁘든, 부유하든 가난하든, 상황이 어찌됐든, 이 세상에서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다는 말이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쉼이 무슨 뜻이든지 여러분에게는 쉼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 고통을 틀어막고, 쳐다보지 않는 방식으로 처리하는 데는 대가가 따릅니다. 자신의 일부가 자라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어머니 안에 성장하지 못한 부분이 제대로 성장했다면 타인에게 공감할 수 있는 능력으로 자리 잡았을 것입니다.
→ “네가 네 인생을 살지 않으면, 네 고통을 거두어들이지 않으면 이런 일이 일어난다. 너의 삶은 매일 줄어들 것이다.
→ 하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제가 들을 수 있는 말씀을 전혀 하지 않으셨습니다. 제가 볼 수 있는 일을 전혀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삶이라는 판 자체를 완전히 날려버리지 않으면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고 계시다는 놀라운 느낌이 들었습니다. 세익스피어가 어떻게든 <햄릿> 속으로 들어가 연극의 연극다움을 다 망쳐버리지 않으면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죄다 하는 방식으로 말이지요. 저는 하나님이 격렬하게 자제하면서 숨죽이고 계시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제가 상상하듯이 하나님은 개입해서 상황을 바로잡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십니다. 하지만 어떻게 삶의 본질을 파괴하지 않은 채 그렇게 하실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개입하시고 상황을 바로잡기 시작하시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요? 우리는 인간이 아니게 됩니다. 더는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더는 받은 달란트로 이 일을 하거나 저 일을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게 됩니다. 체스판의 말이 되는 겁니다. 그러나 저는 하나님의 침묵 속에서 격렬한 자제를 느꼈습니다. 그분의 침묵은 고요했지만 무언의 웅변으로 가득했습니다. (33-34)
→ 망가진 삶의 회복에 관한 한, 종교적 용어로 말하자면, 영혼 구원에 관한 한, 인간의 최선은 거룩하신 분의 최선과 상충하는 경향이 있다. 세상의 잔혹함과 최악의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 이를 악물고 주먹을 불끈 쥐며 최선을 다해 스스로 뭔가 해 보려는 바로 그 행동 때문에 더 놀라운 역사가 우리를 위해, 우리 안에서 일어나지 못한다. 현실의 가혹함에 맞서 스스로 모질게 무장할 때의 문제는, 삶이 파괴당하지 않도록 지켜주는 그 강철 같은 무장 때문에 생명의 근원인 거룩한 능력이 마음을 열어 변화되게 하는 것까지도 가로막는다는 점이다. 누구나 혼자서 견뎌낼 수 있다. 그러나 아무도 혼자서 인간답게 될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슬픈 비유처럼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는 낙타가 바늘귀를 빠져나가기 만큼이나 어려운 것이다. 부자는 주머니에 들어 있는 신용카드로 자신을 위해 뭐든지 다 살 수 있기 때문에 정작 이 세상에서 자기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선물로 받을 수밖에 없다는 걸 이해하지 못한다. 설령 ‘좋으신 하나님’이 도움의 손길을 내미신다고 해도 주먹을 꼭 쥔 손으로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는 걸 이해하지 못한다.
→ 사람들 말에 따르면, 우리는 사실 아무것도 잊지 않으며, 모든 과거는 그저 우리 내면 깊숙한 곳 어딘가에 도사린 채 자기를 다시 표면에 떠오르게 할 풍경이나 냄새나 자그마한 소리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54)
→ 아버지의 죽음은 내 안에 다른 사람의 고통으로 통하는 문을 열어 주었다. 하나님도 아시지만, 내가 다른 사람을 많이 도와준 것도, 그런 적이 있는 것도 아니다. 나 역시 그러기엔 너무 소심하고, 믿음도 연약하며,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이고, 까다로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인생에서 알게 된그 고통을 통해 대단한 도움의 손길까지는 아니라고 해도 적어도 내 눈이 열렸다. 그래서 어느 인생에나, 가장 운이 좋아 보이는 인생에도 고통이 있으며, 묻어버린 슬픔과 상처 입은 기억이 모두에게 있다는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
한 번에 다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큰 것들, 단번에 깨닫기에는 너무나 작은 것들, 아마 우연히 일어나지만, 우리가 보게 되는 이러한 순간들. 나는 우리의 눈과 더불어 마음도 열어 주는 이러한 순간들이 결코 우연이 아님을 믿기로 작정했다.
나는 그것을 기이하고도 거룩한 은혜라고 불렀다. 기이한 까닭은 아무도 그 은혜를 도무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상실과 고통 한 가운데서, 우리 자신의 내면의 세계에서 솟아오르는 이 기이한 은혜의 방식과 때와 장소를 누가 예견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거룩한 까닭은, 이런 은혜의 순간들이 궁극적으로 오즈보다 더 먼 곳에서, 그리고 운명보다 더 깊은 곳에서 찾아오기 때문이다. 우리를 치유하고 깨끗하게 해 주기 때문이다. ”알려지거나 알려지지 않았거나, 기억되거나 잊혔거나 주님이 베푸신 모든 복에 대해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고 하는 옛날 기도문처럼, 거의 알려지지 않는 사람들과 거의 잊힌 사람들을 위해서 우리 인생의 여정을 돌아볼 필요가 있는 이유는, 그들의 존재 덕분에 우리 각 사람의 인생이 거룩한 여정이 되기 때문이다.
→ 행여나 과거를 만날까 봐 현재에 매달립니다. 수면 아래 숨어 있는 것이 두려운 나머지 수면 위로 나온 것에 매달립니다.
→ 사정은 다들 다르겠지만, 저는 심장이 돌로 변하게 만들 만한 슬픔과 고통을 겪었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안 그런 사람이 있겠습니까? 저는 잘못된 길을 선택한 적이 많고, 바른 길이라도 잘못된 이유로 선택한 적이 많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그들에게나 저에게나 유익이 되지 않는 방식으로 과하게 사랑한 경우도 많고, 사랑할 수 있었던 사람들을 사랑하지 못하고 잃어버린 경우도 많습니다.
→ 과거와 미래, 기억과 기대, 기억하고 소망하십시오. 기억하고 기다리십시오. 그분을 기다리십시오. 우리 모두 그분 얼굴을 압니다. 과거 어디선가 그 얼굴을 희미하게 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그분의 생명을 갈망합니다. 과거 어디선가 누군가 그렇게 사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그렇게 살았던 순간이 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분을 기억하십시오. 옆에서 죽은 강도를 기억하겠다고 약속하신 그분이 친히 우리를 기억하십니다.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우리의 소망함을 통해 소망의 내용이 우리 안에서 실현되기 시작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십시오.
→ 평화는 전쟁이 없는 시기, 또는 큰 전쟁이 없는 시기를 의미하게 되었다. 우리는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런 상태만으로도 만족할 것이다. 그러나 히브리어에서 평화에 해당하는 단어 ‘샬롬’은 온전함을 뜻하고, 온전하고 행복하게 자기 자신이 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갖추었음을 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