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 교약서와 성경 읽기는 어떤 관계일까?
<<읽다 살다>> 북토크를 했어요.
1. 별명이 ‘책벌레’시고 이 별명을 좋아하시는데요. 일반적인 책읽기와 성경 읽기는 어떤 면에서 유사점과 차이점이 있을까요?
작년에 《소설 읽는 신자에게 생기는 일》이라는 책이 기독출판계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 “반지의 제왕이나 나니아 연대기에는 마법사나 마녀, 마법의 세계가 등장하니까 기독교인은 읽지 말아야 하지 않나” 하는 분위기도 있거든요. 문학서나 인문교양서 읽기와 성경 읽기가 서로 긍정적/부정적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다고 보시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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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읽는 신자에게 생기는 일』은 읽어봤습니다. 새롭고 날카로운 분석이 좋았고, 책을 덕목(기본 덕목 4권, 신학적 덕목 3권, 천국의 덕목 5권)이라는 기준으로 소개해서 새로웠습니다. 홍종락 님이 번역하셨죠.
홍종락 번역가가 올해 『악마의 눈이 보여주는 것』을 출간했습니다. 문학책 24권을 소개했습니다. 『악마의 눈이 보여주는 것』에도 나니아 연대기를 소개하지요. 마법사와 마녀, 마법의 세계가 나오니까 나니아 연대기를 읽지 말아야 할까요?
『리어왕』은 질투, 배반, 욕망을 다룹니다. 리어왕과 세 딸 모두 비참하게 죽습니다. 오셀로는 자살하지요. 마법의 세계가 등장하는 걸 기독교인이 읽지 말아야 한다면 『리어왕』과 『오셀로』는 읽지 말아야 합니다. 『햄릿』에는 귀신이 나오니까 안 됩니다. 『죄와 벌』은 살인이 나오고, 루이스가 쓴 『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까지』는 그리스 신화로 썼으니 안 됩니다.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는 두목 악마가 졸개 악마에게 쓴 편지니 역시 읽으면 안 됩니다. 『햄릿』을 제외한 책 모두 『악마의 눈이 보여주는 것』에 소개되었습니다. 아, 『악마의 눈이 보여주는 것』이라는 제목 자체가 ‘삐~’ 검열 대상이네요. 악마가 나오잖아요.
더 설명하지 않아도 제가 무얼 말씀드리려는지 아시죠? 필립 얀시가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라는 책에서 오염되지 않은 마지막 낱말을 ‘은혜’라고 했습니다. 미국에서는 하나님과 예수님 이름조차 감탄사로 쓰이다 못해 욕으로 쓰일 지경입니다. 어떤 낱말이 쓰였느냐로 판정하면 글쎄요, 읽을 만한 책을 고를 수 있을까요?
물론 나쁜 책이 있습니다. 읽지 말아야 할 책이 있습니다. 그런 책을 특정 낱말이 쓰였는지 여부로 판단하는 건 순진한 생각입니다. 문학서나 인문 교양서는 생각의 폭을 넓게 해줍니다. 저는 문학책을 좋아합니다. 문학책은 인물 사이의 관계를 다룹니다. 어떤 인물이, 어떤 상황에서, 어떤 성격과 배경을 가졌기 때문에, 어떻게 행동하는지 보여줍니다.

『소설 읽는 신자에게 생기는 일』에 『위대한 개츠비』가 나옵니다. 1차 대전이 끝나고 유럽이 전쟁의 폐허에서 일어나려고 허덕일 때 미국은 초유의 호황을 누렸습니다. 졸부들이 탄생했죠. 개츠비도 그 중 하나입니다. 몇 년 뒤에 대공황이 찾아올 줄 모르고 흥청망청댔습니다. 1938년에 나온 『분노의 포도』는 졸부의 시대가 끝나고 대공황이 가정을 무너뜨리는 이야기입니다. 출애굽기를 모티브로 합니다. 가난한 소작농들이 66번 도로를 타고 가면서 절망하고 또 절망하는 이야기입니다. 분노의 포도가 무르익어 터질 지경이죠.
문학책은 당시 배경을 알아야 제대로 읽습니다. 배경을 모르고 『위대한 개츠비』를 읽으면 개츠비 같은 남자의 사랑을 받고 싶다고 읽을 수 있습니다. 물론 그렇게 읽어도 됩니다. 다만, 저자의 의도와 상관없는 읽기죠. 마음에 드는 한 부분만 골라서 기억하고 받아들이는 건 성경을 읽을 때도 많이 실수하는 오류입니다.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하리라는 한 구절만 기억하는 것처럼 말이에요. “너희는 여호와의 책에서 찾아 읽어보라 이것들 가운데서 빠진 것이 하나도 없고 제 짝이 없는 것이 없으리니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령하셨고 그의 영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라(사 34:16)” 동물이 모두 짝이 있다는 내용을 말씀 짝 찾기로 읽는 겁니다. 신천지에서 사용하는 방식이에요.
문학과 성경 모두 배경 이해가 중요합니다. 바울이 로마 교회에 쓴 편지를 뵈뵈가 가지고 갑니다. 뵈뵈는 여러 사람과 바울의 보호자(홈 16:2)가 되었다고 합니다. 보호자는 헬라어로 파트로네스입니다. 파트로네스(후원자, 보호자)와 클리엔테스(고객, 피보호자)는 로마의 문화였지요. 이를 이해하면 뵈뵈가 부유한 귀족이었음을 압니다. 로마에서 편지를 들고 교회를 찾아다니기에 적합한 사람이지요.
바울이 드로아에서 강론하다가 유두고가 떨어져 죽습니다. 로마의 주택은 도무스와 인슐라로 나뉩니다. 바울이 강론한 곳은 인슐라입니다. 주상복합주택 같은 곳입니다. 윗다락은 다락으로 2층이어서 유두고는 3층에서 떨어진 겁니다. 『로마인 이야기』나 『마스터즈 어브 로마』 시리즈를 알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배경, 맥락뿐만이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다룹니다. 이를 사람 사이의 관계로 보여줍니다. 관계가 왜 깨질까요? 인간이 교만하고 이기적으로 행동합니다. 하나님의 겸손과 오래 참으심을 이용합니다. 『오만과 편견』이라는 책이 있지요. 오만은 다른 사람이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편견은 자신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우리 모습이지요. 오만과 편견을 읽으면서 말씀을 묵상하는 것과 같은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읽으면 하나님 마음을 더 느낄 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너무 성경만 보면 편협하고 꽉 막힌, 종교에 심취한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바리새인처럼 말이죠. 그들은 사람 마음을 읽는 능력이 없어서 문자만 강요했습니다. 책읽기와 성경 읽기는 돌비에 새겨진 규정을 읽는 게 아닙니다. 둘 다 이야기를 읽고 마음을 읽는 겁니다. 문학은 이야기를 통해 사람의 마음을, 성경은 사람들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