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사람이 아니라, 너!
“그럼 당신이 아라비스를 다치게 했나요?”
“그렇단다.”
“왜죠?”
“얘야, 난 그 애가 아니라 네 얘기를 하고 있어. 난 당사자 얘기만 하지.”
“당신은 도대체 누구세요?”
보이지 않는 목소리가 땅이 울릴 정도로 아주 굵직하고 낮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나 자신이다!”
나니아 연대기 3권 『말과 소년』은 말이 주인공이다. 소년 샤스타가 종으로 팔릴 위기에 처하자 말인 브레가 샤스타를 구해내서 나니아를 찾아 도망한다. 둘은 친구를 만나고 적에게 쫓기다가 위기를 넘긴다. 마지막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아라비스가 떠나고 샤스타 혼자 남을 때 샤스타가 아슬란에게 묻는다. 아슬란은 아라비스가 아니라 “네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대답한다.
예수님께서 부활한 뒤에 베드로가 갈릴리에서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하고 물었다. 예수님은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바란다고 한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오너라.(요 21:21-22)”라고 말씀하셨다. 샤스타와 베드로의 질문은 우리 앞에서 이렇게 바뀐다. “이 사람은 어떻게 돼요?”, “저 사람도 구원받나요?”, “쟤는 이렇게 하잖아요!”
“아니, 죄인이 회당장의 앞길을 가로막다니?”
“~ 회당장 가운데서 야이로라고 하는 사람이 찾아와서 예수를 뵙고, 발아래에 엎드려서 간곡히 청하였다. "저의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오셔서, 그 아이에게 손을 얹어 고쳐주시고, 살려 주십시오." 그래서 예수께서 그와 함께 가셨다. 큰 무리가 뒤따라오면서 예수를 밀었다.(막 5: 21-24)”
아버지가 죽어가는 딸을 살리기 위해 예수님 발아래 엎드렸다. 회당장이라는 직책과 무리의 시선도 아빠라는 이름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회당장이 예수님 발 앞에 엎드린 모습을 보고 손가락질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회당장은 엄격한 유대 율법을 지키는 바리새인이었을 테니까. 그래도 사랑이 더 강했다. 예수님은 절박한 아버지와 함께 딸을 만나러 가신다. 그런데 예수님이 야이로의 집으로 가는 동안 절박한 다른 여자가 끼어든다.
“열두 해 동안 혈루증으로 앓아 온 여자가 있었다. 여러 의사에게 보이면서 고생도 많이 하고 재산도 다 없앴으나 아무 효력이 없었고 상태는 더 악화되었다.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서 뒤에서 무리 가운데로 끼어 들어와서는 예수의 옷에 손을 댔다. (‘제가 그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나을 터인데!’ 하고 생각했다.) 그런 다음에 곧 출혈의 근원이 마르니, 여자는 몸이 나은 것을 느꼈다.(막 5: 25-29)”
그녀는 12년 동안 병을 앓으며 많은 의사를 찾아다녔지만 낫지 않고 괴로움만 당했다. 가진 재산 다 날려도 고치지 못했다. 이런 일을 겪으면 비관하게 된다. 좌절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여자는 예수님 옷에만 손을 대도 구원받는다는 믿음을 갖는다. 꼴 보기 싫은 의사와 바리새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아슬란)를 바라본다.
피나 고름을 계속 흘리면 몸이 닿는 사람은 모두 부정해진다. 유출병 있는 자와 접촉하는 자뿐만 아니라 유출병자가 앉았던 자리에 앉는 사람까지 부정하다(레 15:2-13). 공공장소에 다니지 못하고 성전에도 들어가지 못한다. 그런데도 여자는 부정한 몸이 가져올 결과보다는 예수님을 만나겠다는 마음으로 군중을 뚫고 간다. 옷을 만져도 낫지 않을 수도 있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밀며 옷에 손을 댔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도 여자는 예수님께 나아간다.
“~ 두려워하여 떨면서, 예수께로 나아와 엎드려서 사실대로 다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안심하고 가거라. 그리고 이 병에서 벗어나서 건강하여라."(막 5: 30-34)
여자는 믿음으로 병이 나았지만 기쁨도 잠시, 자신의 수치를 고백해야 한다. 예수님께 다가오는 동안 접촉한 사람을 모두 부정하게 만들었으니 고백하기 힘들다. 병이 나았으니 조용히 돌아가면 좋을 텐데 예수님이 사람들 앞에서 말하라 한다. 여자는 무리 앞에서 ‘모든 사실’ 즉 혈루증 걸린 사실을 낱낱이 말해야 했다. 이때 회당장 야이로는 어땠을까? 예수님이 딸을 고쳐준다고 했을 때는 너무나 기뻤겠지만 부정한 여자가 예수님 붙들고 시간 낭비할 때 화나지 않았을까? 혈루증 여인에게 시간을 내주는 예수님께도 화가 났을 것이다. “저 여자가 왜?”
“너 때문에 내 자식이 죽었다!”는 생각 앞에서
그때 딸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고치기는커녕 임종을 지켜보지도 못했다. 회당장은 혈루병 걸린 여자가 꼴 보기 싫었을 것이다. 차라리 예수님을 찾아가지 않았다면 마지막 모습이라도 볼 텐데, 여자가 길을 가로막지 않았다면…… 여자가 야이로를 가로막았다. 그래도 예수님은 믿기만 하라(눅 5:36)고 하신다. 자기를 방해한 여인의 믿음을 본받아야 하는 상황이라면 정말 싫겠다. 복잡하게 얽힌 감정을 어찌할지 몰라 당황하면서 예수님을 따라간다. 아무 말도 못 하고, 여자를 원망하며, 원망하는 자신을 안타까워하며 예수님을 따르는 야이로가 딱 우리 모습이다.
“예수께서 사람들이 울며 통곡하며 떠드는 것을 보시고, 들어가셔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떠들며 울고 있느냐? 그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하셨다. 그들은 예수를 비웃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을 다 내보내신 뒤에, 아이의 부모와 일행을 데리고, 아이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셨다.(막 5: 38-40)”
야이로가 소망을 갖고 따라갔는지 모르겠다. 마음 한구석에 ‘혹시나’ 하는 마음이 있었을 것 같다. 아빠 마음을 모르는 사람들은 아이가 죽었으니 예수님을 귀찮게 하지 말라고 했다. 죽은 아이를 위해서 통곡하며 떠드는 일 외에 무얼 할 수 있으랴! 우리는 상황을 바꾸지 못하기 때문에 곡이나 하면서 사람들이 정해놓은 규정에 따른다. 아이가 이미 죽었으니 어쩔 수 없을까? 그러나 예수님은 아이가 잔다고 하신다. 자는 아이는 깨우면 일어난다. 시각이 완전히 다르다. 죽음도 예수님께는 깨우면 되는 잠에 불과하다. 무리가 죽었다고 단정 지은 사람을 예수님께서 살리신다. 아이가 살아나고, 야이로가 위로받고, 예수님의 능력이 무리 가운데 나타났다.
예수님이 아이의 손을 잡으시고 "달리다굼!" 곧 일어나라 말씀하셨다. 그러자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어 다녔다. 여자가 혈루증을 앓기 시작할 때 태어난 12살 아이가 살아났다. 혈루증 앓는 여인이 예수님 앞을 가로막았을 때 “저 사람은 왜?” 했던 야이로에게도 기쁨이 찾아왔다. 여인은 ‘나를 비난한 사람들’을 잊고, 야이로는 ‘나를 방해한 여인’을 잊고 예수님만 바라본다.
아슬란을 만난 기쁨과 두려움에 젖어 샤스타는 ‘그 사람’에 대한 생각을 잊었다. 아슬란 앞에 엎드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공동체에 꼴 보기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될지 궁금한 사람이 있다면, 예수님께 “저 사람은 어떻게 되나요?” 물어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말과 소년』을 읽어보시라고 권한다. 본회퍼가 이렇게 말했다. “공동체를 향한 자신의 꿈을 사랑하는 사람은 진지한 열정을 갖고 있다 해도 공동체를 파괴할 것이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을 사랑하는 사람은 공동체를 만들어갈 것이다.” 예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또한 ‘저 사람’도 사랑하신다.
함께 읽으면 좋은 책
『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까지』, C. S. 루이스, (고등학생 이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