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자들
독서 모임에서 예언자들을 읽었습니다. 제가 발제한 내용입니다.
Ⅰ 들어가며
1. 저자와 역자 소개
가. 아브라함 요수아 헤셸 (인터넷 서점 저자 소개)
유대인 학자이며 사상가로서 온 인류를 사랑한 경건한 랍비로서, 미국의 베트남 정책에 대한 저항운동의 지도자였고, 소련에 사는 유대인을 돕자고 세계에 호소한 최초의 유대인이었으며, 기독교-유대교의 대화를 재촉한 강력한 에큐메니스트였다. “내 중심된 관심사는 인간의 정황이다”라는 자신의 말을 행동으로 실천한 사람이었다.
1907년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유명한 랍비 가문에서 태어나, 1927-33년 독일의 베를린대학에서 공부하고 박사학위를 받았다. 1937년 마르틴 부버로부터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레르 하우스의 후계자로 지명되었고, 나치의 폴란드 학살이 있기 두 달 전에 영국으로 건너갔다. 1940년 미국 신시내티 히브리 유니온 대학에 초빙받아 5년간 철학과 랍비 문학 강의, 1945년부터 별세할 때까지 아메리카 유대교신학교에서 신비주의와 유대교 윤리를 가르쳤다. 1965-66년 미국 유니온신학교에서 최초로 해리 에머슨 포스딕 객원강좌를 맡았다. 미네소타, 아이오와, 스탠포드대학교 등에서도 강의했다. 1965년 봄, 알라바마의 셀마에서 마틴 루터 킹과 함께 민권행진을 하였다.
주요 번역서로 『하느님을 찾는 사람』, 『사람을 찾는 하느님』, 『사람은 혼자가 아니다』, 『누가 사람이냐』, 『어둠 속에 갇힌 불꽃』, 『안식』이 있다.
나. 이현주
관옥(觀玉)이라고도 부르며, ‘이 아무개’라는 필명을 쓰고 있다. 1944년 충주에서 태어나 감리교신학대학교를 졸업했다. 목사이자 동화작가이자 번역가이며, 교회와 대학 등에서 말씀도 나눈다. 동서양의 고전을 넘나드는 글들을 쓰고 있으며, 무위당(无爲堂) 장일순 선생과 함께 《노자 이야기》를 펴냈다. 『바보 온달』
2. 머리말 (10쪽 분량) / 예언자는 사람(언어, 몸짓, 감정 표현 등)이다. 확성기가 아니다.
머리말 뒤에 <1940~45년의 순교자들에게>라는 글과 시편 44편이 있다. 1940~45년 사이에 유대인 600만 명이 죽었다. 랍비인 헤셸은 하나님께서 왜 홀로코스트를 허락하셨는지, 유대인에게 무엇을 말씀하려 하시는지 고민했을 것이다. 『예언자들』에는 홀로코스트에서 친구와 이웃을 잃은 유대인 랍비의 고뇌가 담겼다.
3. 우리 시대의 예언자
1990~2000년대는 예언과 예언자가 다수 출현했다. 1992년 다미 선교회가 재림 날짜를 예언한 이후 다수의 예언자(미국 중심)가 대한민국이 위험하다고 예언했다. 성적인 범죄 때문에 대한민국이 무너진다는 국가적 예언부터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말하는 개인적 예언까지 넘쳐났다. 그들이 유명해지고 부자가 될 동안 가나안 신자가 늘어났고 교회가 비난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신자들은 자신을 위한 예언을 듣기 위해 기도원으로, 집회로 찾아갔고 그 결과 우리나라 기독교는 지극히 개인적인 종교로 바뀌고 말았다. 반면 하나님의 마음으로 외치는 사람도 나타났다. 소리 없는 울음을 듣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 시대에 예언자가 있다면 미래를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으로 애통하는 사람이라 생각한다.
Ⅱ 『예언자들』 내용
1장 : 예언자란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가. 악에 민감한 사람
– 세상의 아름다움은 보지 않고 분노에 가득 차서 온 세상이 더러운 시궁창이라도 된 듯 고함을 치르는 사람이다. 별것 아닌 일에 고함치는 사람, 남들이 괜찮게 생각하는 것에 흥분하는 사람, 우리가 에피소드로 여기는 것을 세상의 끝장으로 보는 사람이다.
- 예언자는 철저하게 느끼는 사람이다. 하느님은 그의 영혼에 무거운 짐을 지워주셨고 그는 고개를 숙여 인간의 무모한 탐욕에 망연자실해 있다. 인간의 아픔은 실로 끔찍하다. 그 어떤 인간의 말로도 넘치는 두려움을 전달 못 한다. 예언이란 하느님이 인간의 아픔을 표현하라고 빌려주신 말이며 착취당한 가난한 자들과 세상의 불경스런 부자들에게 내리신 말이다. 그것은 하나의 삶의 양식이며 하느님과 인간이 서로 만나는 접촉점이다. 하느님은 예언자의 말을 통하여 당신의 분노를 드러내신다. (36) 예언자의 하느님은 고아와 과부의 신음을 지나치지 않는다.
나. 인간의 역사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
- 혼자 떨어져 말만 하는 사람이 아니다. 듣는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인간이다. 말뿐만 아니라 삶으로 더욱 예언한다.
다. 다른 것을 보는 사람
- 사람들이 위대한 도시를 선망하며 칭송하는 반면, 예언자는 건물과 도시의 장엄함 대신 폭력과 억압, 도덕적인 문란을 보았다.
- 사람들이 죄에 잠시 분노하다가 안일과 진정과 위안으로 돌아가는 반면, 예언자는 영원히 살아계시는 분처럼 밤이고 낮이고 끝없이 넌더리를 치면서 살아간다.
- 졸지도 자지도 않는 하나님처럼 예언자는 언제나 진지하게 괴로워한다.
라. 우상을 부서뜨리는 사람
- 사람들이 성전과 사제직과 분향을 종교로 받아들이는 반면, 예언자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조차 우상 숭배로 보았다. 거룩한 성전과 제사를 공격하며 예언자들은 자신이 먼저 부서지는 사람이다.
마. 현실을 과장해서 받아들이는 사람
- 개인의 목숨을 파멸시키는 자를 온 세계를 파괴하는 자로 대하며, 한 사람을 구원하는 자를 온 세계를 구원하는 자로 대우한다. 별것 아닌 이에 지나치게 반응하는 사람이다.
바. 소수의 잘못에 대한 책임을 모두에게 묻는 사람
- 백성의 도덕적 상태를 계속 상기시켜 준다. 세상이 편히 누워 잠자는 동안 예언자는 현존하시는 하느님의 영광에 사로잡혀 하늘에서 불어오는 동풍을 본다. 재앙과 역병, 고통, 파멸을 외치며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사. 외로움 가운데 고뇌하는 사람
- 예언자들은 외톨이가 되어 고통을 겪었다. 쓰고 불쾌한 일을 감당해야 했다. 동시대인들에게 미친 자라고 낙인찍혔다. 그래도 예언자들은 외쳐야 했다. 듣든지 안 듣든지.
아. 분석자, 전달자, 증인
- 야훼의 회의에 참석해서 하느님과 함께 의논하며 하느님의 생각을 전달하는 증인이다. 예언자는 하나님을 말하는 자다. 하나님의 증인이다.
2~8장 : 사례로 살펴본 예언자
가. 배경 설명 (성경을 돌려드립니다. 90쪽)
선지자는 일어날 일을 선포하지만 점치는 사람이 아니다. 선지자란 말은 ‘선포하는 자, 몸으로 뒹굴다’는 뜻이 있다. 선지자는 하나님 말씀을 붙들고 몸으로 뒹굴며 외치고 반응하는 사람이다. 선지자는 마이크로만 사용되지 않았다. 하나님께 묻고 따지기도 했다. ‘외침’은 급할 때 부르짖는 소리다. 선지자는 심판과 징계를 외치며 하나님께 돌아와 멸망을 피하라 했으나 백성은 듣지 않았다. 이사야는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고백하지만 ‘이 백성이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라’는 말씀을 들었다. 아무리 말해도 외면당할 줄 알면서 외쳤다.
선지서는 특정한 시대에 부름을 받아 당대 사람에게 외친 기록이다. 선지자가 외칠 수밖에 없도록 만든 ‘바로 그 상황’을 이해하고 지금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귀 기울여야 한다. 이스라엘 역사에 따라 4가지로 나눈다.
시간 | 당시 강대국 | 주요사건 | 활동한 선지자 |
BC 8세기 | 앗수르 | 북이스라엘 멸망 | 요나, 아모스, 호세아, 미가, 이사야 |
BC 7세기 | 바벨론 | 남유다 멸망 위기 | 나훔, 스바냐, 오바댜, 요엘, 예레미야, 하박국 |
BC 6세기 | 바벨론 | 바벨론 포로 | 에스겔, 다니엘 |
BC 6-5세기 | 페르시아 | 포로 귀환 | 학개, 스가랴, 말라기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 |
헤셸은 예루살렘 멸망 이전에 활동한 예언자 중 6명(이사야를 1, 2로 나누면 7명)을 시대순으로 다룬다. 예언자의 마음이 절절하게 드러난 예언자를 주로 다루었다. 아모스와 호세아는 북이스라엘에, 미가와 이사야와 예레미야와 하박국은 남 유다에 외쳤다.
나. 아모스
- 유다 왕국 베들레헴 남쪽 드고아 출신으로 북 왕국에 관해 예언함. 북 이스라엘은 남쪽에서 온 예언자의 말을 들을까? 북 왕국 통치자들에게 남쪽 출신 목자의 말이 들렸을까?
- 헤셸이 하느님의 무서운 침묵으로 가득 찬 세상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홀로코스트를 바탕에 두고 아모스를 생각한 것 같다. 양을 치면서 돌무화과나무를 가꾸던 아모스는 하느님의 힘찬 음성에 사로잡힌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는 ‘작고 조용한 음성’의 속삭이는 소리를 듣는 대신 목자와 양떼를 공포 속으로 몰아넣는 사자의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듣는다. 아모스는 성실성의 결여와 자비를 베풀지 않는 것을 저주한다. (72쪽)
- 하느님이 당신의 모든 적들 위에 군림하시어 온 세계를 친히 다스리실 ‘야훼의 날’이 오고 있다는 믿음을 그들은 갖고 있었다. 대다수 사람은 이스라엘이 무슨 형편에 있든 관계없이 그날에 구원받으리라고 믿었다. 그들에게 야훼의 날은 이스라엘을 포함한 모든 나라에 대한 심판과 형벌의 날이 아니라 이교도 나라들에게만 형벌이 떨어지는 그런 날이었다. (78쪽) 아모스는 이를 뒤집습니다.
- 야훼가 진노하고(73), 백성의 잘못으로 구원자가 고통받으나(75), 이스라엘은 우상을 버리지 않았다.(77) 아모스가 전하려 했던 하느님의 혐오감과 아모스의 절망감은 무시되었다. 이스라엘이 살 길은 하느님을 찾는 길밖에 없었으나 이스라엘이 그럴 가망이 없었다.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지 않으면(81) 구원(82)은 불가능하다.
- 헤셸은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의 메시지가 아모스의 전부라고 말하지 않는다. 하느님이 이스라엘에게 낙심하고 심히 미워하는 마음을 가졌지만, 아모스는 하나님 생각에 동의하면서도 백성을 향한 연민을 품는다. 북 이스라엘 백성의 죄악을 보시는 하나님 마음에 공감하면서도 남 유다 사람으로 북쪽 형제를 동정했다. 아모스는 하나님의 심판과 백성을 향한 사랑 사이에서 짓눌리면서 외쳤다. 호세아는 이스라엘에게 하느님을 만날 채비를 하라고 권면한다. 멸망으로 끝내지 않고 희망을 내다보게 한다.
다. 호세아.
- 솔로몬이 죽은 뒤에 이스라엘은 두 나라로 갈라진다. 유다는 예루살렘을 수도로, 이스라엘은 사마리아를 수도로 정한다. 남쪽 유다는 유다 지파 단일 체제를 유지하기 때문에 왕위 계승에서 반란의 위협이 적었고 줄곧 다윗 왕가에서 왕이 이어진다. 성전을 중심으로 하나님을 잘 섬겨 왕조가 오래도록 이어진다. 유다는 8명이 선한 왕이었지만 이스라엘은 초대왕 여로보암부터 모두 우상을 섬겼으며 단 한 명도 선한 왕이 없었다. 유다가 섭정(아달랴) 포함 20명이 344년을 다스린 반면 이스라엘은 19명이 208년을 다스렸다. 10지파 연합 체제인 이스라엘은 지파 사이에 세력 다툼이 자주 일어나 왕권이 약하고 왕이 자주 바뀌었다. (성경을 돌려드립니다, 75쪽)
- 호세아는 앗수르 제국의 상황에 따라 격랑에 휘말리는 시대에 살았다. 당시 북 이스라엘은 반란과 찬탈이 계속되는 모략과 음모의 온상이었다.
- 아모스가 미완으로 남겨둔 것을 호세아가 처리해야 했다. 아모스는 하느님의 정의를 선포했고 공의를 물처럼 흐르게 하라는 그분의 강철 같은 의지를 전달하였다. 호세아는 인간에게 쏟으시는 하느님 사랑의 놀라운 사실을 드러내기 위하여 왔다. 하느님은 정의를 요구하시는 하느님일 뿐만 아니라 당신의 백성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이기도 하다.
- 호세아는 사랑만 선포하지는 않았다. 하느님의 분노가 무시무시하게 터져 나온다고 외쳐야 했다. 호세아도 아모스처럼 진노와 동정 사이의 긴장(94) 가운데 선포했다. 하느님은 이스라엘에게 버림받은 존재로 자신을 드러내신다. 호세아가 음란한 여인 고멜에게 버림받은 것처럼. 음란한 여인을 다시 데려와서 결혼 관계를 유지하려는 노력이 이스라엘을 향한 하느님의 모습이었다. 호세아는 자신의 결혼이 하느님의 마음을 나타낸다고 알았을까? 이해하지 못하고 하느님 말씀이기 때문에 따랐다면 호세아는 확성기에 불과했을 것이다. 하느님은 이스라엘과 온전한 감정적 일체를 경험하기 원했고, 이스라엘이 이를 배반하자 호세아가 이 마음을 느껴야 했다.
- 헤셸은 고멜이 창녀가 아니라 바람 피우는 여인으로 묘사한다. (700쪽, 각주 6)
- 지금도 잘못 인용하는 호세아 6장 1~3절 말씀에 대해 여호와는 “내가 반기는 것은 제물이 아니라 사랑이다. 제물을 바치기 전에 하느님의 마음을 먼저 알아다오.(호 6:6)” 라고 말씀하신다.
라. 이사야
- 아모스와 호세아는 여로보암 2세가 다스리던 번영의 시대에 살았다. 이사야는 솔로몬 다음으로 명성을 떨치며 국력이 절정에 이른 우찌야(웃시야)가 죽었을 때 예언자로 부름을 받았다. 아시리아가 약소국을 약탈하고 삼키며 사마리아를 멸망시켰고 유다의 장래도 불투명해졌다. 아시리아가 동쪽에서 전쟁하는 틈을 타서 유다와 아시리아 사이의 소국들이 반아시리아 동맹을 맺고 유다를 압박했다. 아하즈 왕은 아시리아 왕의 아들과 종이 되기로 했다. 이때 여호와께서 반아시리아 동맹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고 아시리아의 종이 되라는 말도 아니었다.
- 예언자는 <역사란 하느님의 일이 실현되는 무대로서 그 위에서 숱한 왕국과 제국들이 일어섰다가 사라진다고 아는 예언자는, 한순간의 안개와 그림자들 너머에 있는 섭리를 내다보았다.>라는 말을 이해한다. 단기간에 아시리아가 전성기를 맞았다가 몰락하는 상황에서 이사야는 왕과 백성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등불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 같을 때도 섣불리 나서지 않고 기다렸다. 당시 상황에서 이사야처럼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 이스라엘은 메소포타미아와 에집트 사이에서 살아남아야 했다. 거대한 제국 사이에 낀 작은 나라는 외교술로 줄타기를 해야 한다. 현실 정치에서는 가장 좋은 방법이지만, 예언자는 이를 거절한다. 예언자는 아시리아가 무너지고 에집트도 의지할 바가 아닌 줄 알았다.
- 그렇다고 이사야가 아는 척하거나 냉소하지 않았다. 이사야는 깨닫지 못하는 백성에게 깨달으라고 외치며 기진맥진했다. 왕족과 귀족이 자기 배를 불리려고 백성을 등치는 모습을 참지 못했으며, 하나님께서 격렬하게 진노하신다고 외쳤다. 그러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와 슬픔은 의미없이 사라져버렸다. 오직 예언자만 이를 느낄 뿐이다.
- 예언자는 하나님의 고통과 슬픔에 젖어들었고, 하나님께서 심판하는 대상인 백성에 대해서도 동정했다. 하나님 말씀을 들으며 하나님 마음과 하나가 되었고, 백성에게 외치며 백성의 마음과도 하나가 되었다. 이사야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선포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사야의 마음을 이해하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하나님 마음을 이해하는 사람이 없었던 것처럼.
마. 미가
- 히스기야 시대에 예루살렘의 멸망을 처음으로 예언했다.
- 예언자는 고독한 사람이다. 그가 선 자리는 너무 높고 그의 덩치는 너무 크고 그의 관심은 너무 치열해서 보통 사람이 그것을 더불어 나눌 수가 없다. 맨꼭대기 봉우리에 살고 있는 그의 하느님밖에는 상대가 없다. (175쪽)
바. 예레미야
- 유다 말기 왕들(요시아부터 시드키야까지)이 다스리던 때에 하나님 마음을 전했다. 예루살렘이 멸망하리라 예언했고 실제로 멸망을 지켜보았다. 유다 말기 진노의 시대에도 사람들은 때와 징조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예레미야는 그가 사는 시대가 어떤 시대인지를 알았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느님의 타오르는 분노와 안타까운 사랑의 마음을 말해야 했다. 예레미야는 하느님의 슬픔과 분노를 온몸으로 느끼고 한탄, 비탄, 슬픔, 애곡으로 표현했다.
- 예레미야가 선포한 예언은 야훼께서 영원히 거하리라 약속한 거처를 포기한다는 내용이었다. 이스라엘이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이다. 예레미야는 듣지 않는 백성에게 심판과 회복을 말했다. 하나님이 화난 줄 모르는 백성에게 심판과 회복을 말해야 했으니 얼마나 답답했을까! 예레미야는 이스라엘과 한몸이 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몸소 체험했다.
- 예레미야는 천성이 부드럽고 자애로운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가 감당해야 할 일은 극단적으로 하기 싫은 일이었다. 이것이 그를 호전적이며 참을성 없고 성 잘 내는 사람이 되게 했다. 그가 위하여 기도해 준 사람들은 그의 적이 되었다. (211) 그러나 예레미야도 다른 예언자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예언이 실제 재난으로 닥쳤을 때, 공포의 도가니 속에서 울부짖는 백성에게 희망과 위로의 말을 들려준다. 앗시리아가 무너지고 바벨론이 일어섰으며 예루살렘이 함락되었다.
사. 하박꾹
- 여호야킴 시대(느부갓네살이 승승장구할 때)에 활약한 유다 출신 예언자였다.
아. 제2이사야 (40~66장)
- 유대인 랍비로 헤셸은 이스라엘이 야훼의 고난받는 종이라고 보았다. (예수님이나 메시아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이스라엘이 고난을 받으므로 만민이 해방과 구원을 얻는다고 말한다. 제2이사야는 고난받는 종을 선포한다. 이스라엘의 고난은 하느님의 선물이며, 이 선물에는 하느님의 고통이 포함된다. 그래서 이사야는 야훼를 ‘해산하는 여인’으로 비유한다. 이는 어느 예언자도 감히 하지 못한 표현이다.
- 이스라엘의 죄악을 닦달하신 하느님이 이스라엘에게 사랑을 표현하신다. 이스라엘을 만국의 빛으로 삼으시며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백성에게 장엄한 현존을 드러내신다. 제2이사야는 이스라엘의 해방과 만민이 시온으로 돌아오는 기대를 보여준다.
자. 결론
아모스는 하나님의 심판과 백성을 향한 사랑 사이에서 짓눌리면서 외쳤다. 호세아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 마음을 보여주기 위해 율법에서 쫓아내라고 말하는 음란한 여인과 결혼 생활을 계속 유지해야 했다. 이사야는 혼란한 역사의 소용돌이 가운데 하느님의 진노와 슬픔을 느끼라고 선포했다. 또한 하느님의 사랑이 시온을 회복하리라 기대했다. 미가는 영원한 도성, 하나님의 은혜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임하는 곳 예루살렘의 멸망을 선포해야 했다. 예레미야는 이사야 자신도 이루어지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는 일이 이루어지리라고 외쳐야 했다.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에 맺혀진 매듭을 풀어보려고 했다. 하박꾹은 인간을 너무나도 사랑하시기에, 인간의 잘못에 대해 진노를 퍼붓는 하나님의 방법이 옳지 않다고 따졌다.
예언자들은 외쳐야 하는 말씀에 동의하지 않았다. 하박국은 하나님 말씀에 반대하며 덤벼들었다. 예언자들은 말씀을 선포하기 전에 하나님 마음을 이해해야 했다. 하나님 말씀을 깊이 공감하고 백성들에게 말씀을 선포해야 했다. 하나님 마음을 이해했기 때문에 그 선포는 예언자의 몸짓과 표현으로 드러나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표현이었다.
예언자들은 단순하게 들은 대로, 본 대로 외치는 게 아니었다. 그들의 마음은 백성의 잘못을 보며 분노했고, 그들은 심판하는 하나님께 섭섭했고, 하나님 말씀을 선포하며 하나님 뜻을 이해하고 하나님 마음에 자신의 마음을 잇닿아야 했다. 전망, 분노, 수용, 슬픔 사이를 오갔다. 예언자의 말씀뿐만 아니라 예언자가 느꼈던 감정(파토스)이 곧 예언이었다.
예언자는 괴로움과 외로움을 견디며 백성들 가운데서 살아야 했다.
9~11장. 역사, 징벌, 정의
가. 역사
- 권력은 물리적인 힘을 내세워 백성을 강압으로 지배한다. 메소포타미아와 에집트는 강한 힘으로 제국을 이루어 주위 나라를 지배하고 백성을 괴롭혔다. 그들은 정의를 무너뜨리고 평화를 빼앗았다. 권력에 희생당하는 대중도 권력의 편에 선다.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 에집트는 백성을 위협하며 악을 자행했다. 그들은 백성을 생각하지 않았다.
- 그러나 예언자는 권력에 대항한다. 예언자들은 제국이 힘을 내세우는 걸 악이라고 보았다. 그 누구도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역사는 제국의 지배자와 왕들을 신의 호의를 받은 자들로 보았다. 오직 예언자만이 ‘하느님께서 약한 자의 편에 있다’고 선포하였다. 역사가 권력을 가진 지배자들 손을 들어주었으나, 오직 하느님만이 비천한 자, 짓밟힌 자, 나그네와 가난한 자, 과부와 고아에게 마음을 두신다.
- 따라서 역사는 하느님이 도전받으시는 장이며 정의가 패배를 맛보는 곳이다.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은 ‘좋은’ 곳이었으나 인간이 개입하는 순간 하느님은 ‘좋다’ 하지 않는다. 예언자는 역사 안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심을 두고 살아간다. 인간이 힘을 이루는 것이 역사이기에 심판을 외칠 수밖에 없다. 예언자는 인간의 사건(지배자의 권세와 힘이 이루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경험을 본다.
- 그렇다고 예언자가 세상을 증오하거나 문명을 경멸하지는 않았다. 예언자가 하느님께 가까이 다가갈 때만 문명의 불안정성을 말하고 거짓됨을 폭로했다. 하느님께서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이 중요했다.
- 역사는 하느님께서 당신에게 맞도록 모양을 이루신다. 그러나 하느님은 자주 인간사에서 떨어져 계신다.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역사에 임재하셔서, 하느님 뜻이 실현되기를 바랐다. 개인의 신비가 아니라 모든 백성이 의를 배우는 계시가 임하기를 바랐다. 하느님께서 개입하시면 백성은 범죄의 결과를 감당해야 하며 이는 무서운 형벌로 나타난다. 그러면 예언자는 백성이 당하는 재난에 당황하며 고통스러워한다. 이것이 예언자들의 본질적인 역설이다.
- 예언자들은 역사 현실을 경험하고 관찰하면서 하느님께 받은 메시지를 그대로 전달하기 어렵다는 생각에 이른다. 사람들이 개량(개선)을 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개입하는 역사는 개량이 아니다.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가며 고통당한 뒤에 비로소 구원이 임한다. 이후에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이 임할 것이다.
- 하느님이 약속하신 축복은 역사가 이룬 것과 다르게 다가올 것이다. 권력에 취해 오만방자한 니느웨가 아니라 조용한 거주지 예루살렘에 사람들이 모여들 것이다. 하느님의 도와 그분의 길을 걷는 법을 배우고자. 인간은 스스로 구원을 이루지 못한다. 인간의 역사는 스스로 충족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일을 기대하지 않는다. 예언자만이 확신한다.
- 전쟁과 죄악이 가득한 역사에서 예언자들을 구한 건, 그들이 본 메시아에 대한 환상과 인간이 회개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예언자는 인간이 이루는 역사를 보면서 낙담하지만, 낙담을 초월하는 힘을 가진 사람이다. 다른 날을 기대한다.
나. 징벌
- 예언자들은 형벌을 외치면서도 회의를 품었다. 하느님의 목적은 앙갚음, 저지, 교정이라기보다 순결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언자들은 고통이 순결을, 형벌이 교정을 가져오지 못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예언자들이 하느님을 마주 대하여도 백성들은 계속 그들을 등졌다. 예언자가 하느님께 들은 말씀을 백성은 전혀 듣지 않았다. 예언자에게 바위를 부수는 망치 소리가 백성에게는 전혀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보고 들은 것을 백성이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은 불가사의한 수수께끼였다.
-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자유로 인간은 죄악에 빠져 형벌을 불러왔다. 마음이 굳어진 백성을 치유하는 길은 굳어진 마음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것이다. 마음이 완전히 굳어버리면 절망으로 바뀌고 자만심이 끝장난다. 그때 비로소 하느님을 찾는다. 이때 하느님께서 형벌로 말씀을 끝내시면 인간에게 희망이 없다. 어느 말도 그분의 마지막 말씀은 아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끝나지 않는다. 인간의 행동이 변하면 하느님의 심판도 변한다. 구원의 사랑이 다시 시작된다.
다. 정의
- 예언자가 희생제물보다 도덕성을 강조하는 건 역설이다. 고대 사회에서는 희생제에 인간의 행동을 함께 요구하지 않았다. 제물을 드리며 만족하고 기쁘게 돌아오면 그만이었다. 원시 종교의 신들은 기도와 제물을 바치면 만족했다.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하는지는 신들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런데 하느님은 왜 정의를 중요하게 여겼을까? 예언자는 왜 백성에게 공의(즉 이웃을 대하는 태도)를 외쳤을까?
- 의(쩨다카)는 정의를 넘어선다. 정의는 법률상 의이며 의는 박애, 친절, 관용을 포함한다. 하느님은 의로운 분이며 억압받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하느님은 인간이 올바른 관계를 수립하기를 바라신다. 이를 민감하게 인식하는 사람이 예언자다. 예언자는, 무력해서 누군가 도와주지 않으면 착취당하기만 하는 사람을 위해 나선다. 하느님께서 사랑하는 대상(인간)에게 관심을 갖는 것처럼 우리도 관심을 이웃에게 옮기며 사랑하라 하셨다. 자기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면서 동시에 남에게 그대로 해야 한다(의무). 이것이 미쉬팟이다. 미쉬판과 쩨다카는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개념이다.
- 하느님은 그의 자손과 후손들이 의와 정의를 실현하여 야훼의 도를 지키게 하려고 아브라함을 부르셨다. 의와 정의는 하느님께서 정하신 뜻이다. 의와 정의가 훌륭한 가치이기 때문은 아니다. 이사야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정의 속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올라 기림을 받는다고 했다.(341) 하느님께서 역사하시면 하느님의 의가 역사를 이끄신다. 인간을 측은하게 여기는 하느님의 마음이 정의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의로 구원받는다. 하느님께서 역사에 참여하시려면 예언자들이 하늘의 정념에 참여해야 한다. 예언자는 인간이 하느님과 긴밀한 관계를 맺는다는 사실을 드러내어 선포해야 했다. 고아와 과부를 측은하게 여기는 하느님의 마음을 의로 선포하는 일이다.
2부.
1부에서 예언자 개인의 사상에 하느님의 정념이 차지한 자리가 어떤 것인지 살펴보았다.
2부에서는 그것의 보편적인 특성을 예언자 신학의 중심되는 범주로 여겨 신중하게 살펴보겠다. (352)
예언 행위의 내용을 정념과 예언자의 동정으로 설명한다(1~4장). 14장에서 예언자가 ‘어떤 형식으로’ 주장하는지 밝힌다.
1장. 정념의 신학
- 예언자들은 하나님에 대한 이론이나 가치관이 없었다. 그저 이해할 뿐이다. 공부하고 연구해서 깨달은 관점이 아니라 보고 겪으며 이해한 하느님의 태도이다. 사변을 통해 얻은 지식과 달리, 하느님의 현시를 통해 직관적으로 인식하고 이해했다.
- 예언자들은 계시의 순간을 통하여, 역사 속에 하느님이 임재하신다는 표징을 느껴 알았다. 분석, 연역법이나 귀납법 따위로 얻어내는 결론이 아니라 그분과 함께 삶으로 얻는 소득이었다. 하느님은 근본적으로 알 수 없는 분이지만 또한 반사적인 직관으로 이해할 수 있는 분이었다.
- 정념의 하느님은 관계의 하느님이다. 단순히 명령하고 복종을 기대하는 분이 아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에 동요되고 영향을 받으며 반응하신다. 인간의 행실과 사건에 따라 기뻐하고 슬퍼하고 즐거워하고 분노한다. 멀리 떨어진 심판관이 아니다. 인간사에 긴밀하게 반응하신다. 이를 보며 예언자들은 하느님께서 정념을 지닌 분이라고 생각했다. 하느님은 인간과 역동적인 관계를 이루신다.
- 헤셸은 하느님께서 유대인 600만이 가스실에서 죽어가는 것을 무심하게 지켜보기만 하는 분, 세상을 만드시고 멀리 떨어져서 간여하지 않는 무심의 제1 원인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많은 사람이 수용소에서 하느님을 버렸지만, 또한 많은 유대인이 하느님을 함께 고통당한 분으로 이해했다. 유대인 랍비가 하느님을 ‘함께 사는 배우자요 파트너며 대리인’이라고 고백했다. 죄, 범죄, 고통은 인간의 실패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낙심(358) 표현했다. 인간의 행실은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그것이 인간을 향한 행실인 한 하느님의 삶에도 영향을 미친다. 1장을 읽으며 하나님이 우리와 관계를 맺으시며 우리를 깊이 사랑하신다고 느꼈다.
- 정념이 무엇일까? 격정(감정적인 흥분, 무모한 감정)이 아니다. 기질도 아니다. 하느님은 전적 타자가 아니다. 인간과 계약(언약)을 맺고 백성과 상호작용하는 과정에서 하느님이 백성과 함께 나누며 이루는 무엇이다.
- 하느님의 정념은 영원한 것과 일시적인 것, 의미와 신비, 형이상학적인 것과 역사적인 것의 하나됨이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 창조주와 피조물의 상호작용,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과 당신의 백성 사이의 대화에 진정한 바탕이 된다. 예언자의 예언자 됨은 미래를 내다보는 데 있지 않고 지금 여기에 있는 하느님의 정념을 꿰뚫어보는 데 있다.
2장. 비교와 대조 (타 종교와 하느님의 정념을 비교하고 대조한다.)
- 만물을 창조하신 분, 당신이 창조한 것들 가운데 보잘 것 없는 한 분자가 저질러놓은 일에 영향을 받는단 말인가?
- 하느님의 정념은 에피쿠로스, 그리스, 힌두, 자연신론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과 다르다.
- 노자의 도, 유교, 힌두 철학, 불교와도 다르다.
- 그리스의 운명, 메소포타미아의 필연, 에집트의 예정된 운명, 점성학과도 다르다.
- 원시 종교의 신들은 인간에 대해 악의적이며 질투한다. 그러나 하느님은 다르다.
3장. 정념의 철학
- 그리스 사상에 뿌리를 둔 철학의 전제들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유다교와 그리스도교의 신학자들은 2천 년이 넘도록 하느님의 정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이 가진 전제는
- 인간이 감정 또는 열정에 빠지는 것은 외부의 영향에 휘둘리는 것이므로 약자라는 증거였다. 신은 이러지 말아야 한다. 신은 물질처럼 피동일 수 없다고 생각했다. 또한 신은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는 부동의 동자이므로 감정과 거리가 멀었다. 신은 열정, 즐거움과 슬픔, 사랑과 미움, 덕행과 악행과 상관없는 존재라 생각했다. 오히려 냉정(감정을 억압함)이 신의 속성이라 생각했다. 따라서 지혜로운 사람은 냉정하며, 감정에서 해방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신은 화를 내지도 않고, 겁내거나 불쌍한 마음을 품지도 않는다고 믿었다. 서양 도덕론도 비슷한 견해를 보였다.
- 그러나 과연 하나님이 방관자, 느끼지 못하는 분일까? 성경은 예언자들의 하느님이 피조물을 돌보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영원한 하느님이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심을 둔다는 것은 유례가 없는 관점이었다. 그리스 철학자들은 신이 자기 때문에 존재하는 존재물들에게 영향을 받는다는 것은 그가 절대자임을 부인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예언자들은 신을 고정된 존재로 보는 관점을 거부하고(본재의 변화는 타락이라는 가치관에 반대하며) 하느님이 인간을 보시며 다양한 감정을 보이는 분이라고 선포했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역사에 관심을 보인다고 알았으며, 인간을 변화시키는 일이 하느님 뜻이라고 생각했다. 예언자의 하느님은 멀리 떨어져서 무심하게 바라보는 신이 아니었다. 창조주, 구원자, 역사의 주인이라고 선포했다.
4장. 신인동감동정설 (예전에 많이 공감했으나 다시 읽으니 이해하기 어려운)
- 고대 사상가들은 신인동형동성설을 싫어했다. 시기하고 질투하는 신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 신이 인간이나 동물처럼 몸과 지체를 가진 것도 싫어했고, 감정이나 열정을 지닌다는 것도 견디지 못했다. 또한 인간이 신이 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포함하는 개념이어서 싫어했다. 결국 그들은 신이 인간의 감정을 느낀다는 생각을 도무지 용납할 수 없었다.
- 성경은 신상을 배격했다. 인간이 신을 그려내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하느님을 완전하게 설명해봐야 인간은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하느님은 하나님이 하신 일, 하나님의 길, 하느님이 기뻐하는 길을 말할 뿐이다.
- 하느님의 본질을 인간의 언어로 묘사하지 못한다. 예언자들도 하느님을 묘사하거나 설명하려고 하지 않았다. 현존을 나타냈다. 이를 위해 추상 언어가 아니라 장엄하고 격렬한 언어를 사용해야 했다. 머리가 아니라 가슴에 말해야 했다. 이것이 하느님의 정념이라는 뜻 같다.
5장. 진노의 의미와 신비 (434쪽 질문과 『해바라기』(시몬 비젠탈)
-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분노를 말했다. 인간사에서 분노는 좋은 감정이 아니다. 그렇다면 예언자가 외치는 하느님의 분노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 분노는 신성한 정념의 표현 방식이다. 성경이 말하는 분노는 죄악을 볼 때 솟구치는 감정이다. 분노는 하느님의 관심을 드러낸다. 예언자는 무관심을 폭로한다. 하느님의 분노는 무관심을 끝장낸다. 하느님은 인간이 선을 행하는 것을 기뻐하시므로, 때로는 분노하신다. 하느님은 인간의 잔혹함에 상처입은 피해자에 대한 연민과 동정을 분노로 폭발시킨다.
- 그러나 분노는 하느님 사랑의 표현이다. 분노는 잠깐이요, 자비는 무궁하다. 하느님은 인간을 돌보기 위해 분노하신다. 인간을 사랑하기 때문에 분노하신다. 하느님의 진리와 정의에 힘을 넣어주는 것이 분노다.
- 신인동감동정설과 연관해서) 분노는 하느님의 속성이나 기질이 아니다. 인간의 모습에 따라 다르게 반응하는 상태 중 하나다. 인간이 하나님 뜻대로 살아가면 하느님은 분노하지 않는다. 하느님의 분노를 보고 인간이 돌이키면 분노를 거두신다.
6장. 이라 데이(신의 분노)
- 구약에서 자주 보이는 진노하시는 하느님에 대한 반대 : 마르키온은 구약성경의 의로운 창조주, 자신의 분노를 특히 강조하면서도 동시에 애정을 강조하는 조물주의 불완전함을 공격했다.
- 영지주의로부터 시작되어 테르툴리아누스, 아르노비우스, 락탄티우스, 클레멘트와 오리게네스를 거쳐 아우구스티누스에 이르러 하느님이 무감각하시다는 이론이 일반화된다.
- 지금까지도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집단학살을 자행하고 잔혹하게 벌하는 파괴자라는 생각이 이어졌다. 사람들은 어린아이를 바위에 메어치는 하느님이 과연 선하신지 묻는다. 이는 정념을 지닌 하느님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 못 하고 특별히 정념의 한 형태로서의 분노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억압받는 자들의 신음 소리가 당신의 귀에 닿을 때, 하느님의 분노가 폭발한다.
7장. 동정(sympathy, 동정, 공감, 위로)의 종교
- 정념으로 볼 때 인간은 신성에 동정으로 반응한다. 예언자는 스토아의 현인인 냉정한 인간과 반대로, 동정하는 인간이다. 하느님의 정념에 휩싸이면 예언자는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는 마음으로 동정한다. 동정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현존에 자기를 열어놓는 상태를 말한다. 예언자들의 거의 모든 말에는 동정이 메아리쳤다.
- 예언자는 백성을 회개하게 하여 새롭게 하고, 회복하고, 하느님과 화해하게 한다. 백성이 하느님의 분노를 두려워할 때 예언자는 하느님의 분노가 곧 아픔인 줄 안다. 괴로워하는 하느님의 마음을 백성에게 전해 뉘우치고 회개하게 한다.
- 동정은 하느님과 함께 동정함, 하나님에게 동정함의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전자는 둘이서 한 느낌을 함께 느끼는 것이다. 후자는 하느님의 정념을 이해하는 것이다. 예언자는 하느님의 정념을 이해하고 반응한다. 예언자는 하느님이 느끼는 대로 인도받는다. 이렇게 하느님의 정념에 의해 움직이는 사람이 예언자다.
- 정념으로서의 영(루아흐)
- 예언자의 동정은 철학자들이 말한 우주의 공감과는 다르다. 종교적 열광과도 다르다. 신이 수난을 겪고 부활하거나 힘을 되찾는 것과도 다르다. 예언자가 말하는 정념의 하느님은 하늘과 땅의 최고 지배자로서 인간의 행실에 관심이 깊어 감정적으로 영향을 받는 분이다. 예언자는 하느님의 정념에 가까이함으로 같은 감정을 느낀다.
8장. 예언과 무아경
- 헤셸은 무아경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 8~10장에서 135개(42, 65, 28)의 참고 자료를 인용해서 학자들이 예언자들의 경험을 무아경으로 보는 이론에 반박한다.
- 무아경은 영혼이 육신을 이탈하는 것이다. 그리스인은 혼이 더 이상 제자리에 있지 않고 육체를 떠난 혼수 상태 혹은 신과 합일된 상태로 이해했다. 신접(광신)은 신이 인간의 몸에 거하는 상태이고 무아경은 혼이 몸을 이탈한 상태이다.
- 그리스, 소아시아,로마, 셈족, 신플라톤주의 등 여러 가지 무아경을 소개한다.
9장. 무아경 이론
- 알렉산드리아의 필로가 시작한 무아경의 역사를 설명한다. 이단으로 정죄받은 몬타누스와 그를 변호한 테르툴리아누스 외에 교부들은 무아경 이론을 거부하였다.
10장. 무아경 이론의 검토
- 구약 예언자들은 무아경은 경험하지 않았다. 그들은 반응하고, 대화하고, 질문하고, 때론 거절한다.
- 예언자들은 광란에 빠지지 않았다. 신과의 신비스러운 합일을 추구하지도 않았다. 인격이 소멸되지도 않았다. 예언자는 인격체로서 하느님과 만나 대화했다. 무아경에 들어가려는 의지도 없었다. 예언자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갑자기, 뜻밖에, 미리 기대하거나 준비하지 않은 상태에서 하느님의 음성을 듣는다. 또한 예언자는 자의식의 상실 혹은 정신력의 일시 중단을 겪지 않았다. 또렷한 의지로 하느님을 만났다. 예언자는 경험한 내용을 언어로 표현하여 전달한다. 무아경과 달리 감추려 하지 않고 오히려 드러낸다. 또한 예언은 사적인 일이 아니다. 예언자는 자신의 개인적 구원이나 깨달음이 아니라 민중의 삶에 관심이 있다. 그들이 하느님을 섬기게 하는 것에 목적을 둔다. 무아경은 그것 자체가 목적이나 예언은 예언할 메시지가 목적이다. 무아경은 이 세상을 떠나 천상의 신비를 경험하는 게 목적이나 예언자는 하느님이 관심을 두는 세상, 당대의 사회 정치적 문제에 관심을 둔다. 무아경은 내면에서 경험하는 상태를 중요하게 여기나 예언은 인격자를 만나 메시지를 받는 것이 중요하다.
- 예언자들이 얻은 모든 통찰의 바닥에는 모든 것을 포함하는 뜻과 영속성이 흐른다. 그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 속에 이스라엘과 맺으신 하느님와 계약과 그 계약을 지키라는 하느님의 요구가 들어있다. 따라서 예언의 말을 선포하게끔 고무시킨 예언자들의 일상생활은 발작적으로 일어나는 사건들의 연속이 아니라 거대한 드라마의 부분들로 이해되어야 한다.
11장. 예언과 시적 영감
- 8~10장에서 예언이 무아경과 다르다고 반박한 뒤에, 11~13장에서 예언을 시인과 예술가들이 창작의 순간에 맛보는 경험, 황홀한 정신에 사로잡히는 시인과 같다는 견해에 반박한다. 180개의 참고 자료를 들어(81, 51, 48)
- 오랫동안 성경은 율법, 기도서, 교리서로 읽혔다. 문학이나 역사로 읽는 것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17세기 자연신론자들은 이성을 진리 탐구와 판단의 유일한 도구로 주장했다. 이에 따라 성경에 대한 전통적인 견해가 비판당했고 예언자의 계시라는 개념 자체가 의문시되었다.
- 18세기 계몽 철학이 일어나면서 신의 문서가 인간의 문서로 바뀌었다. 스피노자, 로크 등은 이성을 진리의 시금석으로 삼았다.
- 그러나 이성을 지나치게 높이는 가치관에 반대가 일어나서 합리주의 자들이 멸시하던 종교적 요소가 작품에 다시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성으로 차갑게 대하는 태도와 감성으로 열광하는 태도 사이를 오가며 성경은 문학 비평의 대상이 되어갔다. 헤셸은 이 과정으로 설명한다. (545-553)
- 19세기에는 예술 작품이 오랜 숙고와 정신적 노력의 결과라고 주장했으며, 예술 작업을 성욕의 표현으로 설명한 프로이트까지 다양한 견해가 등장했다.
- 이 과정에서 신학을 만족시키기 위해 예언자를 단순한 도구와 그릇으로 설명하여 인간의 자발성을 없애버리거나, 심리학을 만족시키기 위해 영감을 자연스런 현상으로 설명하며 초인간적인 영감을 없애버렸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하는 방식으로는 예언자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 예언자는 영감을 받는 순간 수동적이다. 그러나 예언자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안다. 예언자 자신이 영감의 근원을 알고, 영감으로 받은 메시지가 일관성을 유지하며, 다른 예언자와 서로 연속되어 있다(고 예언자 또한 이를 안다). 따라서 예언과 시적 영감은 다르다.
12장. 예언과 정신 이상
- 고대부터 위대한 시가들은 영감을 받고 사로잡혀 등장했다고 했다. 헤셸은 시의 창조가 광기에서 나오는 신비라고 말한 역사적 증거를 보인다.
- 이 문제는 천재가 정신이상에 결부되었다는 주장으로 이어지며
- 예언자가 영감을 받는 것은 노이로제가 될 수도 있는 뒤틀린 경험에서 파생되는 마음의 상태에 들어간 것이라고 보는 견해로 발전되었다.
- 그러나 문헌에 남은 흔적만으로 한 인간의 잠재의식을 해부하는 것은 위험하다.
- 헤셸은 문서 예언자들의 병리학적 증상들을 검토한(570~580) 뒤에
- 행동 양태들은 시대에 따라 다르게 인식하는 상대성을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우리 시대의 눈으로 예언자를 노이로제나 정신이상에 걸린 사람이라고 해석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정신 착란이라고 부르는 현상이 예언자들한테는 더 높은 영적 질서에서 오는 현상일 수 있다. 예언자가 이해하기 어려운 모습으로 반응하는 건 당연하다. 예언자들의 삶에서 질병의 흔적이 보여도 그들이 주장한 바를 거부하지는 말아야 한다.
- 나비의 어원을 설명하며 어원과 용례가 모호하다고 말한다.
- 예언은 앞에서 설명한 광기, 정신 이상, 노이로제의 발작이 아니라 초월이 본질이라고 말한다.
- 이런 설명을 통해 헤셸은 심리학적 분석, 사회학적 또는 인류학적 이론 작업이 예언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13장. 예언자의 영감에 대한 해석들
- 예언자가 하느님에게 직접 말씀을 받았다는 주장에 대해 사람들은 끊임없이 신비한 요소를 제거하는 방식으로 예언자의 주장을 해석했다. 이런 해석을 살펴보자.
- 예언자들은 시대 정신에 영감을 받아 말했다, 즉 예언은 시대 정신의 발현이라고 주장했다.
- 예언자가 하늘의 소명을 받았다는 주장을 문학적 장식으로 보았다.
- 예언자들이 그리스 철학자들처럼 사색 또는 직관으로 얻은 깨달음을 사람들에게 권위 있게 전달하고자 계시받는 이야기를 만들어냈다고 한다.
- 예언자의 주장은 그들이 내면의 삶을 정확하게 분석하지 못한 결과로 자기 느낌을 외부에서 온 관념으로 잘못 해석했다고 한다.
- 예언은 위대한 인물이나 영웅한테서 볼 수 있는 대로, 인간의 심성 안에 잠재된 힘이 특수하게 밖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생각했다.
- 예언자들을 외국의 앞잡이 또는 선동 전문가로 보는 견해도 있다.
- 이와 반대로 예언자들을 애국자로 보아 조국을 위해 아낌없이 몸을 바친 자들이라는 견해도 있다.
- 그러나 예언은 참으로 단순한 것이다. 신비가 아니라 하나님의 현현이다.
14장. 사건과 경험 (예언자가 경험하는 영감이란?)
- 자기가 하느님한테서 영감을 받았고 하느님의 이름으로 말하며 하나님에 의해서 보냄 받았다는 확신이 예언자 의식의 근본이다. 다른 사람들은 경험을 확신의 근거로 보는데 예언자만은 유독 경험의 근거를 확신의 근거로 삼는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예언자 메시지의 타당성과 특이성은 그의 경험의 순간에만 있는 게 아니라 그 기원에 있다. 무엇보다도 예언자의 의식의 기초를 이루는 것은 자기가 선포하는 메시지가 자신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부정적 확신이다. 에제케엘, 이사야, 예레미야 모두 그랬다.
- 예언자는 자신을 바치겠다고 스스로 다짐한 결심을 말하지 않는다. 부름받은 결정적인 순간을 그대로 서술할 뿐이다. 심지어 예언자가 전한 메시지 내용이 자신의 희망이나 기대와 정면으로 반대되는 때도 종종 있었다.
- 예언 행위는 통화라는 형식으로 이루어지는 행위다. 메시지 내용을 예언자가 충분히 이해하느냐, 그것이 자기에게 전해진 것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아느냐, 그리고 그와 하느님 사이의 교합 또는 만남, 즉 메시지가 그에게 전해지는 형식이 예언자의 통화 행위를 결정짓는다.
- 예언자의 생각에, 예언 행위는 하나의 경험 이상이다. 객관적인 사건이다. 이것이 예언의 본질적인 형식이다. 사건은 정한 때 없이 돌발한다. 우연히 간간이 터진다. 그런즉 영감은 모든 시대에 계속되는 과정이 아니라 한순간에 이루어지는 사건이다. 하느님은 간절히 열망한다고 언제든지 찾아뵐 수 있는 분이 아니다. 때로 하느님은 부재하신다. 예언자가 만나는 것은 발언된 말, 표현된 말, 현존자로부터 솟구치는 말, 시간 속의 말, 말씀 속에서 흘러넘치는 정념이다. 지속되는 상황을 인식하는 게 아니라 발생하는 행위(사건)를 인식하는 것이다.
- 예언자가 의식하는 영감은 그의 내부가 아니라 너머에서 발생하는 신성한 행위를, 인간의 심성이 아니라 시야에 발생하는 사건을 경험하는 것이다. 예언자는 단순히 그것을 느끼는 게 아니라 그것을 대면한다.
- 예언자의 영감 받음은 그냥 들려오는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참여하는 것이다. 탄원하고 반발하기도 한다.
- 하느님은 당신의 본질을 드러내어 계시하지 않는다. 당신의 정념만을, 당신의 의지만을 밝혀주신다.
- 전환(결단)과 지향 : 대체로 하느님은 침묵하신다. 그분의 의도와 계획은 감추어져 있다. 그런데 고요와 초연의 상태로부터 이탈이 일어나 하느님이 숨어계시던 곳에서 계시 행위로 옮겨지는 전환이 발생한다. 이 변화가, 영속하고 영원할 것만 같은 상태 또는 상황에서 언제나 시간 속에서 특이하게 발생하는 만남의 순간으로 옮겨가는 전이를 초래한다. 영원이 순간에 들어간다. 이게 전환이다. 전환은 사건의 태동이고 지향은 그것의 실현이다.
- 성경이 보여주는 인류의 전 역사는 사람을 찾는 하느님의 역사다. 이스라엘의 신앙은 하느님을 추구한 결과로 생긴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이 하느님을 발견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이스라엘을 발견하셨다. 성경은 인간에게 접근하시는 하느님에 대한 기록이다.
- 향인간성과 향신성 : 예언자가 경험하는 영감이란 하느님이 인간에게 향하여 돌아서시는 향인간성이라고 하겠다. 하느님한테서 먼저 오는 것일 뿐만 아니라 인간을 지향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종교는 향신성 행위로 이루어진다.
- 예언자의 의식의 관점에서 본 영감의 두드러진 특징은 632~633쪽에 요약되었다.
15장. 세계 도처의 예언자들
- 이스라엘의 예언과 유사하다고 보이는 현상들을 설명한다.
- 비교 종교학은 인류 경험의 공통점을 보여주지만, 특수성은 밝히지 않는다. 본질적인 차이를 보려면 다른 종교들의 특수성을 드러내야 한다.
- 헤셸은 낡은 견해들을 시작으로 마나(외부에서 인간과 자연의 생명에 침투하는 신비한 힘, 오렌다, 마니투, 와칸다)와 타부(접근 금지), 점술, 예언과 점, 황홀경과 점쟁이들, 꿈, 소크라테스의 수호신, 함무라비 법전, 에집트의 예언자들, 인도와 중국의 계시와 예언, 마리의 예언자들을 설명하고 성경의 예언자의 독특성을 밝힌다.
- 독특성 1. 성경의 예언자는 스스로 예언자임을 주장한다. 초월자의 결단과 지향(14장)이 그에게 임한 사건(14장)을 스스로 의식한다. 조로아스터는 분명히 영감을 받은 자였다. 발람도 그랬다. 그러나 그것은 어둠 속으로 사라진 불꽃이었다. 세상에는 어디든 영감을 받은 자가 있었고 이웃에게 영감을 준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천지의 창조주가 자신을 보냈다고 생각한 사람은 예언자밖에 없었다.
- 독특성 2. 사람들이 언제 어디서나 신의 세계로부터 오는 안내와 도움을 찾고 환상적인 체험과 초자연적 능력을 동경하며 꿈과 환상 속에서 평범한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신비를 보려고 갈망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그런 환상을 바라지 않았다. 오히려 자기를 부르는 소명에 항거하였다. 묵시적 환상을 보는 자들과는 반대로, 포로기 이전의 예언자들은 하늘의 영광보다 땅의 혼란을 본다. 그들이 일반 사람과 다른 점은 인간의 상황을 신의 비상사태로 감지한 것이었다. 성경의 예언은 꿈, 점, 추리, 주문과는 다른 유일하게 독특한 현상이다.
16장. 예언자, 사제 그리고 왕
- 유사 이래 백성은 왕을 신으로 여겼다. 메소포타미아, 히타이트, 파르티아, 일본, 로마에서 왕은 신 또는 신의 아들로 신격화되었다. 심지어 18세기까지 유럽에서도 왕은 법을 초월하여, 법이 제한하는 범위를 벗어난 자였다.
- 그러나 이스라엘에서는 왕의 신격화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인간에게 신성을 부여하려는 시도는 공포와 재난을 초래할 따름이었다. 사회 질서의 핵은 왕도 아니고 사제도 아니었다. 하느님과 백성 사이의 계약이 핵심이었다. 예언자는 하느님의 계약을 어긴 왕과 사제를 비난했다. 왕의 죄, 거짓 예언자와 사제들의 죄악이 재난을 불러온다고 선포했다.
17장. 결론
- 하느님의 정념은 사랑과 노여움, 슬픔과 기쁨, 자비와 분노 등으로 나타난다. 이런 표정들의 공통분모, 즉 정념의 궁극적 의미는 ‘하느님의 돌보심과 관심’이다. 인가에 대한 하느님의 관심이, 사람들을 건져보려고 애쓰는 예언자의 활동의 뿌리가 된다. 그런즉 예언 신학의 궁극적 범주는 간섭, 돌봄, 관심이다.
- 예언자들이 이해하려 한 것은 하느님의 본질과 신비가 아니라 그분이 인간과 맺으시는 관계의 신비다. 예언자는 스스로 계시는 하느님을 숙고하지 않는다. 그분을 생각하는 예언자의 사유 속에는 언제나 이 세계가 들어있다. 그의 메시지는 신의 존재를 밝혀내거나 신의 존재에 관계되는 새로운 진리를 제시하고자 하지 않는다. 예언자가 하느님에 관하여 알고 있는 것은 그분의 정념, 이스라엘과 인류와 맺으시는 그분의 관계다. 예언자는 하느님을 절대 존재로가 아니라 언제나 사람들과 연관지어서 말한다. 그의 말은 하느님의 존재에 대한 해석이 아니라 인간과 하느님의 상호작용에 대한 해석이다.
- 인간이 하느님을 아는 것은 하느님이 인간을 아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하느님을 아는 인간의 지식은 인간을 아는 하느님의 지식 안에서 초월된다. 하느님을 이해하는 것은 하느님에 의해서 이해되는 것이다. 기본이 되는 사실은 우리가 그분에게 보여지고 알려진다는 것이다. 성경의 사람에게는 ‘너 자신을 알라’보다 ‘하느님을 알라(대상 28:9)’가 지상 명령이다. 하느님 이해 없이 자기 이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