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사의 조카』와 외모지상주의
성경을 돌려드립니다 9 (좋은교사 2022-5월호 원고)
“맨 끝에 있는 사람의 얼굴이 제일 관심을 끌었다.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호화스러운 드레스를 입고, 키가 훤칠하며, 숨 막힐 정도로 험상궂고 오만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여인이었다. 그렇지만 그 여인은 너무나 아름다웠다.(69쪽)”
나니아 연대기는 C. S. 루이스가 기독교 세계관을 담아 쓴 동화야.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시고, 죄가 시작되는 『마법사의 조카』부터 새로운 나라가 시작되는 『마지막 전투』까지 일곱 권이지. 『마법사의 조카』에서 디고리가 호기심 때문에 종을 치겠다고 고집을 부려. 선악과를 따먹는 것과 같아. 호기심이 나쁘지는 않지만 잘못 쓰이면 위험해. 종을 쳤기 때문에 사악한 제이디스 여왕이 깨어나. 여왕의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디고리는 그만 유혹에 넘어갔어. 보암직해서 선악과를 따먹은 하와처럼 말이야. 디고리는 할아버지가 되어서도 그토록 아름다운 여인은 없었다고 말해. 여왕의 오만한 아름다움에 눈이 멀어 잘못된 결정을 내린 거야.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나 우리는 외모를 본다.
방송 매체는 사단, 마귀, 마녀를 괴상하고 잔인한 모습으로 표현해. 이들에 맞서 싸우는 주인공은 예쁘고 잘생겼지. 백설 공주는 살려준 사냥꾼에게 감사하지 않았고, 난쟁이 집에 함부로 들어갔으며, 어리석게 독 사과를 받아먹었어. 그러나 예뻤기 때문에 잘생긴 왕자를 만났잖아. 외모가 예쁘면 마음도 착하다는 가치관이 아이들 이야기부터 곳곳에 스며들어 있어.
선과 악은 이렇게 간단하게 나뉘지 않아. 예를 들어볼까? 미켈란젤로가 다윗을 모델로 다비드 상을 만들면서 다윗은 이스라엘의 뛰어난 왕일 뿐만 아니라 완벽한 몸매를 가진 훈남의 대명사가 되었어. 세계 여러 광장과 대학 곳곳에 다비드 상이 있어. 다윗이 정말 미켈란젤로가 만든 다비드 상처럼 생겼을까?
사무엘이 왕을 세우기 위해 이새의 아들들을 만나면서 “'주께서 기름 부어 세우시려는 사람이 정말 주 앞에 나와 섰구나(삼상 16:6)” 하며 감탄했어. 그러나 하나님은 형들의 “준수한 겉모습과 큰 키만 보아서는 안 된다(삼상 16:7)”며 다윗을 찾으셨어. 즉 다윗은 외모가 출중하지 않았어. 사울은 백성보다 머리 하나가 더 컸지만(삼상 10:23) 다윗은 형들과 견주기엔 부족한 막내였어.
미켈란젤로가 다비드 상을 멋지게 만든 까닭은 다윗이 훌륭한 왕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그런데 미켈란젤로는 다윗의 외모에만 신경 쓰느라 생식기를 할례받지 않은 모습으로 조각했어. 이스라엘에서 할례받지 않았다는 말은 이방인에게나 쓰는 모욕이었는데 다윗을 이방인으로 만들어 버린 거야. 다윗은 골리앗을 “할례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자(삼상 17:36)”라고 불렀어. 그런 다윗을 할례받지 않은 모습으로 만들었으니 말도 안 되지.
세상을 선과 악의 전쟁터로 가르는 생각을 이원론이라 그래. 이원론은 역사가 깊어. 고대 사회에서는 우리처럼 이치를 따져서 생각하지 않았어. 태양이 가려지면 신의 저주라 생각했지. 지금처럼 황사가 자주 불면 신의 저주를 풀어야 한다며 제사를 엄청 지냈을 거야. 이원론이 잘 드러난 곳이 그리스야. 그리스 신화는 선과 악의 전쟁터야. 북유럽 신화도 선악의 대결이 강해.
그리스 문화는 페르시아 제국에 영향을 주었어. BC 660년 경에 페르시아 제국에서 조로아스터교가 생겨. 조로아스터교는 페르시아의 영향을 받아 이원론을 바탕에 두었지. 페르시아는 인도 서북부까지 영향을 주었고 인도에서 생겨난 불교에 영향을 끼쳐. 불교 역시 세상은 선과 악의 끝없는 대립으로 생긴 고통의 현장이라며, 속세를 떠나야 한다고 말해. 우리나라는 오래도록 불교를 믿었기 때문에 이원론 방식의 생각에 금방 넘어가. 예수님을 믿으면서 이원론으로 생각하는 거지.
사람들은 보기에 좋으면 그냥 받아들여. 다윗이 할례를 안 해도, 목수로 사신 예수님 손이 곱고 부드러워도 보기 좋으면 괜찮다고 생각해. 예수님은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었어. 목수로 사신 예수님은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는 게 당연해(사 53: 2). 그러나 우리가 흔히 보는 예수님은 잘생긴 백인 외모에 완벽한 물결을 이루는 머리카락을 가졌어. 주위 사람들이 모두 천으로 머리를 동이고 있어도 예수님만은 바람에 머릿결 날리게 만들었잖아. 이원론은 예수님을 멋지고 잘생긴 분으로 둔갑시켰어.
사람들은 뛰어난 업적을 남기는 사람은 외모도 멋질 거라 생각해. 예수님도 온화한 인상을 지닌 잘생긴 남자였을 거라 착각해. 사실과 다르다 해도 ‘기왕이면 보기 좋은 게 낫다’는 생각이 일어나. 더구나 영상매체와 정보통신이 발달하면서 예쁘고 잘생긴 외모가 점점 중요해져. 노벨문학상 받은 책에는 못생긴 사람이 주인공으로 나오지만, 영화와 드라마에선 그렇지 않아. 사람들이 안 보니까.
눈이 가려지지 않게 하라.
기업은 이미지를 광고해. 제품을 좋은 이미지로 포장해서 이미지만을 기억하게 만들어. 소비자가 이미지만 보고 판단해야 물건이 많이 팔리기 때문이야. 그래서 특정한 물건을 소유하면 자격을 갖춘 사람이라고 포장해서 광고해. 유명한 연예인이 제품을 써서 예뻐지거나 잘생겨진 게 아닌데도 연예인 보고 제품을 사게 만들지. 텔레비전은 짧은 광고 시간에 청중을 사로잡아야 하므로 지성의 작동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감정에 호소해. 보고 느끼는 감각만으로 판단해서 물건을 구매하게 만들어. 생각을 마비시키기 위해 화려하고 자극적인 장면을 만들어내. 이런 영상은 우리 인간의 의식을 바꾸어 놓지.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줄 알아도 판단의 기준이 점점 외모와 소유로 기울어지게 되어 있어.
스마트폰과 텔레비전을 들여다보며 자란 아이는 이미지의 포로가 돼. 청소년은 말과 글이 아니라 이미지를 보잖아. 친구를 만나도 대화하지 않고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이미지에 빠져드는 거 봤지? 한글조차 이미지로 바꿔서 표현해. 잘생기고 예쁘면 좋다는 것은 다음 세대를 지배하는 강력한 이미지가 됐어.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image)으로 만들었어. 외모가 어떠하든지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이미지가 반영된 작품이야. 그러나 현대 문화는 하나님의 형상을 무시하고 특정한 이미지를 가져야 좋은 작품이라고 속여.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이웃을 무시하며 잘생기고 예쁜 모습을 찾아다니는 건 우상이야. 이미지가 아니라 실체, 하나님께서 보시는 중심을 보아야 해.
예수님은 잘생기지 않았을 거야. 엘리야는 대머리였어. 낙타 털옷을 입고 광야에서 살았던 세례 요한은 정말 이상하게 보였을 거야. 그러나 이분들은 모두 하나님께 사로잡힌 하나님의 사람들이었어. 기왕이면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은 게 아니냐고 말할 수 있겠지만 현대 문화는 속담이 말하는 수준을 넘어섰어. 취직하기에 좋은 관상으로 얼굴을 고치는 수준이라면 통탄할 일이야.
아이들을 촬영해서 방송하는 과정을 몇 번 지켜봤어. 보통 4~5일 촬영하는데 하루 이틀 남기고 피디가 새로운 걸 찍자고 해. 아이의 일상을 조용히 찍기만 하겠다는 약속이 사라지고 감동적인 이야기, 시청자를 만족시킬 만한 이야기를 조작해내. 시골 아이의 평범한 일상조차 상품으로 바꾸어버려.
영상매체, 친구들과 주고받는 이야기는 줄곧 ‘하나님은 없다’, ‘네 마음에 드는 대로 살아라.’라고 주장해. 가치관을 흔드는 세계관이 사방에서 에워싸고 공격하고 있어. 예수님 믿고 구원받았다고 해도 세계관이 바뀌지 않으면 삶이 바뀌지 않아. 보고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마음에서 벗어나야 해. 그리스도인은 문화에 갇히면 안 돼. 잘생기고 예쁜 게 좋다는 속살거림에 넘어가지 말고 세상 앞에서 당당하자. 우린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어. 사람들이 아무리 외모를 보더라도 당당하게 살면 세상이 우리를 두려워해. 짓눌리지 말고 문화를 뛰어넘자.
함께 읽으면 좋은 책
『나는 사고 싶지 않을 권리가 있다』, 미카엘 올리비에, (중학생 이상)
『죽도록 즐기기』, 닐 포스터먼 (대학생 이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