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돌려드립니다 4. 세 가지 질문
“네가 어디 있느냐?” (창 3:9)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창 4:9)
“네가 무슨 일을 하였느냐?” (창 4:10)
첫 번째 질문, “네가 어디 있느냐?”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자 여호와께서 아담에게 물으셨다.
“네가 어디 있느냐?”
잘못한 아담에게 “무엇을 했느냐?” 묻지 않고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다. 잘못된 곳에 있었기 때문에 잘못된 행동을 했다고 말씀하신다. 아이들이 잘못하면 부모님이나 선생님을 피한다. 눈길을 마주치지 않으려 하고, 함께 있는 자리를 피한다. 어른도 잘못한 게 있으면 피하기 마련이다.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못하는 상태임을 피하는 모습으로 드러낸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었다. 선악과를 따먹은 자리는 아담이 자유롭게 서 있던 곳에서 피해야 할 곳으로 바뀌었다. 한 번 잘못된 장소에 간 뒤에 아담은 피하는 자가 되었다. 여호와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여(창 3:8)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 에덴동산에서 살지 못하고 동쪽으로 쫓겨났다. 그 뒤로 아담의 후손들은 자신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 몰랐다. 어디(여호와 앞)를 장소(where)로 착각하여 자신의 안전을 지켜줄 곳(place)을 찾아다녔다. 바벨탑을 쌓고, 성을 만들었다. 성스러운 곳을 정해놓고 ‘이곳에서는 안정과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믿었다. 예루살렘 성전도 그들이 믿은, 절대로 무너지지 않는 장소였다.
모세가 꺼지지 않는 불꽃을 향해 나아갈 때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 3:5).”는 말씀을 들었다. 모세가 선 곳, 시내산이 거룩하다는 말일까? 특별히 거룩한 장소가 있으니, 그곳에서는 경건한 태도로 고개를 숙이라는 말일까? 우상을 믿는 사람이 나무, 바위, 신령한 장소를 찾아다니듯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할까? 집보다 예배당이,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 상가 건물 예배당보다 기도 응답 잘 받는다는 산속 기도원이 더 거룩할까? 더 특별한 장소가 있을까?
여호수아가 요단강을 건너 여리고에 가까이 왔을 때 여호와의 군대 장관이 나타나서 여호수아에게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다.(수 5:15)” 말했다. 요단강과 여리고성 사이에 있는 장소가 거룩하다는 뜻일까? 그래서 이곳을 길갈이라 부르며 성막을 세웠을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거룩한 곳은 장소가 아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과 언약을 맺을 때(창 15장) “네 자손이 사대 만에 가나안 땅으로 돌아올 것이다. 왜냐하면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않았기 때문”이라 하셨다. 아브람에게 당장 가나안 땅을 주지 않은 까닭은, 그곳에 사는 아모리 족속이 아직 심판받을 정도로 죄를 짓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 땅에 왔을 때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꽉 찼다는 뜻이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사람들의 행동을 본받지 말라 하시며 “너희는 이 모든 일로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내가 너희 앞에서 쫓아내는 족속들이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더러워졌고 그 땅도 더러워졌으므로 내가 그 악으로 말미암아 벌하고 그 땅도 스스로 그 주민을 토하여 내느니라(레 18:24~25)”) 말씀하셨다. 가나안 족속이 쫓겨난 까닭은, 그들이 더러운 행동으로 죄악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여호수아가 선 땅은 가나안 족속이 심판받을 정도로 죄악이 가득한 곳이었다. 땅에 사는 사람이 땅을 더럽혔기 때문에 주인이 바뀌었다.
죄악으로 더러워진 땅에 선 여호수아에게 군대장관이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다.” 했다. 거룩한 까닭은 땅 때문이 아니었다. ‘하나님 앞에 선 사람 여호수아’, ‘바로 네가’ 선 곳을 말한다. 시내산이 있는 땅, 여호수아가 건넌 땅 자체를 말하는 게 아니다. 그 땅은 죄악이 가득해서 심판받아야 하는 곳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이 서면 거룩한 땅이 된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이 선 곳은 어디든 거룩하다. 왜냐하면 그들이 여호와 앞에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여호와 앞에서(Coram DEO) 살기 원하신다.
두 번째 질문,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여호와께서 아벨을 죽인 가인에게 한 질문도 “무얼 했느냐?”가 아니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가인은 여호와 앞을 떠났다. 자신이 여호와 앞에 서지 못하게 되자 동생도 여호와 앞에 서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러자 두 번째 질문이 뒤따른다. 하나님 앞에 사는 존재가 반드시 들어야 할 질문이다. ‘하나님이 곁에 두신 형제가 어디에 있는가?’ 시기와 질투의 대상으로 삼았던 동생이 어디 있을까? 부모는 어디에, 가족은 어디에 있을까? 그들은 여호와께서 기뻐하는 곳에 있나? 아이들은 여호와께서 기뻐하는 길로 가는 중인가?
그리스도인의 삶은 나 개인의 행복으로 끝나지 않는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축복이 내 아우 아벨에게로 흘러가기 원한다. 아벨은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보낸 형제였다. 가인을 하나님께로 이끌 신실한 증인이었다. 여호와께서 아벨의 제사를 받으셨으므로, 가인이 아벨을 잘 살펴보면 가인도 여호와를 기쁘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가인은 아벨을 제거하는 쪽을 선택했다.
내가 여호와 앞에 있다면, 나를 불편하게 하는 사람도 나를 여호와께로 인도한다. 그를 죽이지 말고, 피해 도망가지 말고, 다음번에도 함께 제사해야 한다. 아이, 학부모, 동료 교사, 교장이나 교감이라면 함께 지내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좋은 사람이라면 배우고, 힘들게 하는 사람이라면~ “When a man’s ways please the LORD, He makes even the man’s enemies live at peace with him. (잠언 16:7)” 대학 때 사람의 길(way, 방법)이 여호와를 기쁘게 하면, 여호와께서 그 사람의 원수가 그와 함께 평화롭게 살게 하신다는 잠언 말씀을 참 좋아했다. 나이가 들면서 이 말씀을 현실화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느꼈다.
‘나를 괴롭히는 저 사람이 과연 내 아우 아벨일까?’가 해결되지 않았다. 화평과 평안을 기대하며 여호와의 뜻을 분별하려고 노력했지만, 원수와 평화롭게 살지 못했다. 원수 같은 사람을 죽이고 싶을 때도 있었고, 대부분 피하고 싶었다. 그럼 이 말씀은 무슨 뜻일까? 여호와께서 아벨이 어디 있는지 몰라서 물은 게 아니다. 여호와는 이미 아벨의 피가 땅에서부터 호소하는 소리를 들었다. 여호와께서 아벨이 어디 있는지 물은 까닭은, 아벨을 가인 곁에 두셨기 때문이다.
“내가 아벨을 지키는 자입니까?”는 아벨이 어디에 있든 알 바 아니라는 말이다. 아벨은 가인에게 알 바 아닌 존재가 아니었다. 자신과 다르게 살아가지만, 하나밖에 없는 동생이다. 우리가 모든 사람을 아벨로 생각하진 못해도, 어떤 사람은 동생 아벨 같은 존재이다. 여호와 앞에 갔을 때 여호와께서 적어도 그 사람이 어디에 있는지는 물으실 것이다.
세 번째 질문,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우리는 ‘행동’을 본다. 여호와께서 우리의 모든 행동을 살핀다고 배웠다. 바리새인들의 정체성은 ‘의로운 행동’에 있다. 주일날 설교 내용에서 ‘행동’을 빼면 남는 게 별로 없을 정도로 지금도 행동을 중요하게 여긴다. 그러나 무얼 했는지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아우 아벨이 어디에 있는지’보다 중요하지 않다. 내가 여호와 앞에 있다면 우리의 행동이 일으킨 죄악을 여호와께서 용서하신다. (영화 밀양의 살인범처럼 하자는 말이 아니다. 전혀!)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물었다. 우리 반 아이가 잘못하면 무슨 잘못을 했는지 묻는다. 왜 그랬는지 찾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엇을 했는지를 가장 늦게 물으셨다. 무엇을 하였느냐 묻기 전에 네 이웃이 어디에 있는지 물었다. 이웃에게 어려움이 생겼다면 그건 내가 어디에 있는지 돌아보라는 뜻이다. 나를 살피고, 아이를 살핀 다음에 왜 그렇게 했는지 물어야 하지 않을까?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가 어디에 있는지, 하나님이 곁에 두신 형제가 어디에 있는지, 형제를 위해 무엇을 했는지’ 묻는다. 하나님의 말씀은 “나는 하나님 앞에 있다. 내 형제는 ‘사마리아인’의 모습으로 내 곁에 있다. 나는 먼저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한다.” 라는 대답을 알려주셨다. 우리는 대부분 이 대답에서 멀리 떠나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