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 묵상

성경을 돌려드립니다 3. 쉬지 못하고 떠도는 사람들

책뜰안애 2021. 12. 9. 20:27

<본문>
강 하나가 에덴에서 흘러나와서 동산을 적시고, 에덴을 지나서는 네 줄기로 갈려져서 네 강을 이루었다. (창 2장 10절)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창 3장 23절)
이 땅 위에서 쉬지도 못하고, 떠돌아다니게 될 것이다. (창 4장 12절, 14절)

강원도 태백시에 삼수령(三水嶺)이라는 고개가 있다. 물이 세 갈래로 나뉘는 고개라는 뜻이다. 비가 삼수령 꼭대기에 내리면서 북쪽으로 흐르면 강원도 삼척시로 흘러가 오십천을 이룬다. 빗방울이 남쪽으로 구르면 낙동강으로 흘러가고 서쪽으로 흐르면 한강으로 나간다. 그러나 실제는 이와 다르다. 오십천 발원지는 백산골, 낙동강 발원지는 황지연못, 한강 발원지는 검룡소로 알려졌다.

한강, 낙동강, 오십천은 수많은 골짜기에서 흘러든 물이 모여 이루어졌다. 어느 한 곳에서 강이 출발했다고 보기 어렵다. 한강과 낙동강의 1/10밖에 안 되는 오십천도 작은 지류가 50개 모여 오십천이라고 부른다. 발원지가 50개나 되는 셈이다. 다만 하류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백산골을 발원지라 부를 뿐이다.

에덴에서 뻗어나가는 ~ (창 2장 10절)

에덴동산에는 삼수령이 아니라 사수령(四水嶺)이 있다. 비손강, 기혼강, 힛데겔(티그리스), 유프라테스강이 에덴에서 흘러나간다. 삼수령에 올라 사방을 둘러봐도 한강과 낙동강과 오십천이 보이지 않는다. 삼수령에 오르면 물이 흘러가는 희미한 흔적도 찾지 못한다. 그저 여기 어디쯤에서 흘러나갈 거라 예상할 뿐이다. 에덴동산에서 흘러나가는 강도 삼수령 같을까? 에덴동산 한가운데에도 여기 어디쯤이라 말할 만한 곳이 있을까? 그곳에서 네 강이 흘러갈까?

재미난 상상을 해보자. 만약 아담과 하와(와 후손까지 모두)가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에덴동산에 10억이 산다면? 50억이 산다면? 에덴에 사는 사람이 많아진다면 에덴이 인구를 감당할까? 아담과 하와가 거닐던 동산이 사람 수에 따라 점점 넓어질까? 에스겔이 일천 척 나가면 발목에 오르고, 다시 일천 척을 나아가면 무릎에, 더 나가면 허리에, 마지막에는 건너지 못할 정도로 넓어진 강을 보았다. 에덴동산도 이렇게 넓어질까? 하나님 나라가 커지듯 사람이 많아질수록 에덴동산도 점점 멀리까지 넓어질까? 아담이 쫓겨난 땅까지 에덴동산이 되어 하나님의 사람으로 가득 찰까?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다면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질까? 에덴동산이 넓어지는 게 아니라면, 에덴동산 바깥까지 에덴동산처럼 복된 곳이 되는 건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창 3장 23절)

칭기즈칸, 알렉산더, 나폴레옹은 정복자로 불린다. 출발지에서 가장 먼 곳까지 정복했기 때문이다. 정복지가 넓을수록 영향력이 커지며 사람들이 높게 평가한다. 여호와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아담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하셨다. 아담(과 후손)이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다면, 칭기즈칸과 알렉산더와 나폴레옹보다 더 넓은 땅을 정복해도 여호와 하나님이 만드신 동산 안에 거한다. 달이나 화성에 다다른다 해도 정복이란 말을 쓰는 대신 하나님 나라가 거기까지 이르렀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예수님이 말씀하신 내가 너희 안에, 너희가 내 안에를 이루며 살 것이다. 영향력을 내세우거나 성취감에 우쭐대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고 에덴에서 쫓겨났다. 선악을 알게 되자마자 죄악을 서로에게 떠넘기는 사람이 되었다. 땅이 저주를 받아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며(4:18), 아담은 땀이 흐르도록 수고해야 했다. (4:17, 19) 사람이 달라졌고 땅도 달라졌다. 아담은 중심지(에덴동산)에서 쫓겨났다. 가인은 더 먼 곳으로 이동했다. 아담의 후손이 많아질수록 에덴에서 점점 먼 곳까지 옮겨야 했다. ‘땅을 정복하라는 말씀에 순종한 걸까?

아담은 선악과를 따먹고 에덴에서 쫓겨났다. 쫓겨난 사람은 넓은 땅을 차지하고 멀리 정복할수록 에덴에서 멀어진다. 정복이 아니라 추방이라 불러야 하지 않나? 그렇다면 여호와께 받은 명령의 의미나 명령에 순종하는 태도가 달라져야 하지 않나? 죄악에 물든 사람이, 죄악에 물들기 전에 받았던 명령(땅을 정복하라는 명령), 죄악에 물든 마음으로 따라야 할까?

백인들은 마치 자신들이 에덴동산에서 죄없이 살던 사람들인 것처럼 정복사업을 벌였다. 그 결과 수많은 유색인종(아메리카 원주민, 아프리카 원주민)이 고통을 당했고 죽었다. 단 한 구절을 내세워 아메리카 원주민을 거의 멸절 수준으로 죽게 만들었다. 하나님이 사랑과 은혜로 주신 말씀을 앞세워 아프리카에서 인간을 짐승처럼 잡아 팔았다. 그들은 하나님께 쫓겨난 사람의 후손처럼 보이지 않았다. 마치 정복자처럼 땅을 넓혀갔다.

우리도 넓은 땅에서 높은 짓 짓고 살기를 바란다. 옳을까?

쉬지 못하고 떠도는 자 (창 4장 12, 14절)

가인은 농부였다. 농부는 한 곳에 정착해서 살아간다. 떠돌이 삶을 이해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천하게 여긴다. 중국에서 농경민 한족은 짐승 떼를 이끌고 떠돌며 살아가는 유목민을 모두 오랑캐라고 멸시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고 범죄한 결과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었다. 정착민이 멸시하던 유목민으로 살아야 했다. 낯선 땅에서, 낯선 모습으로 살아야 하는 운명이, 가인에게 내린 형벌이었다.

중심에서 멀리 가는 일이 정복자에겐 성공이지만, 피하며 유리하는 자에겐 추방이다. 높은 건물을 세우고, 넓은 땅을 차지하고 산다 해도 여호와로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피하며 유리하는 중이다. 삶의 목표를 돈과 권력에 두고, 여호와를 떠나 자기 힘으로 왕국을 세우는 일은 헛되다. 얼마나 높이 올라가느냐, 얼마나 멀리 가느냐, 얼마나 넓은 땅을 차지하느냐 생각하기 전에, 출발지를 살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중인지, 피하며 유리하는 중인지……

많은 작가가 헛된 목표를 세우고 자기만의 왕국을 이루었다가 무너진 사람을 이야기로 썼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사람들이 출발지를 생각하기보다 눈앞에 보이는 결과(높은 건물과 넓은 땅)를 바라보기 때문이다. 승진하고, 더 넓은 아파트를 사고, 자녀를 좋은 대학에 보내려는 마음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살펴야 한다. 하나님만 채울 수 있는 공허함을 직위, 재산, 성공으로 채우려는 건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중심에서 솟아나는 강

한강 발원지 검룡소는 작은 개울이다. 오십천 시작되는 곳에는 작은 웅덩이가 있다. ‘이게 발원지야?’ 할 정도이다. 낙동강 발원지인 황지 연못에는 물이 퐁퐁 솟아난다. 땅속에서 물이 솟아나 흘러가기 때문에 맑고 깨끗하다. 물이 흘러가며 지류가 합쳐지면서 커지면 강이 된다. 그런데 성경은 에덴에서 발원한 강이 동산을 적셨다고 한다. 모여서 이루어지는 강이 아니라 솟아나는 강이다. 네 곳으로 흘러 강을 이룰 정도로 물이 넘치게 솟아난다.

지구상에서 강의 발원지를 찾는 방법은 모두 똑같다. 물줄기를 따라 가장 높은 곳을 찾아간다. 그렇다면 에덴은 높은 산꼭대기에 있을까? 흘러서 만들어지는 강이라면 산꼭대기여야 한다. 분수처럼 아래에서 솟아나는 강이라면 다르다. 에스겔이 건너려 했던 물, 발목에서 무릎을 지나 허리에 오르고 헤엄할 만큼 많아진 물은 성전 문지방 밑(에스겔 471)에서 나왔다. 요한이 봤던 생명수의 강도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221)로부터 솟아났다.

쉬지 못하고 떠도는 사람은 솟아나는 곳에서 멀어진다. 물이 모여 강을 이루듯 모이고 모인다. 하나님의 사람은 중심에서 솟아나 밖으로 흘러간다.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자라고 열두 가지 과일이 열린다.

“(나를 포함한) 당신에겐 솟아나는 강이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