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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돌려드립니다 5-모여드는 사람들

책뜰안애 2021. 11. 14. 14:19

가인은 주님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서 살았다. 가인이 자기 아내와 동침하니, 아내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았다. 그때 가인은 도시를 세우고, 그 도시를 자기 아들의 이름을 따서 에녹이라 하였다. (창 4:15~17)

사람들이 동쪽으로 이동하여 오다가, 시날 땅 한 들판에 이르러서 거기에 자리를 잡았다. ~ “자, 도시를 세우고 그 안에 탑을 쌓고서 탑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날리고 온 땅 위에 흩어지지 않게 하자. (창 11장 2~4절)”

구스가 또 니므롯을 낳았는데, 그는 세상의 첫 장사가 되었다. (창 10장 8절, 대상 1장 10절)

 

아담이 에덴을 떠나고 나서 낳은 첫아들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였다. 이때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4:12)” 말씀하셨다. 가인은 (에덴이나 아담을 떠난 게 아니라) 주님 앞을 떠나 동쪽으로 갔다. 가인은 돌아다녀야 할 운명이었다. 그러나 가인은 떠돌아다니기를 거절하고 놋 땅에 정착했다(4:16). 놋은 떠돌다는 뜻이다. 자신이 거하는 곳을 떠돈다는 뜻의 이라 부르고 나는 떠도는 곳에 산다.’ 하며 자신을 속였다. 떠돌아다니라는 명령에 꼼수를 쓴 셈이다.

가인은 누구든 자기를 만나는 사람이 자기를 죽일 거라며 두려워했다(4:14). 불특정 다수가 자신을 해칠 거라고 생각하면 불안감에 짓눌린다. 가인이 자신을 지키기 위해 찾은 방법이 성(Castle)이다. 하나님이 안전을 보장했는데도 가인은 성을 쌓아 외부 공격에서 안전을 지키려 했다. 쌓은 성이 멋있어 보였는지 아들 이름을 붙였다. 떠돌아다녀야 하는 사람이 도시를 세우고 성에 아들 이름을 붙였으니 명백한 불순종이었다. 하나님 말씀대로 떠돌아다녔다면 성을 아들에게 물려주어 자손 대대로 성에 자리를 잡고 잘 살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가인의 아들, 성주 에녹

가인은 하나님의 에덴을 대신하여 도시를 만들고 아들 에녹을 성주로 삼았다. 성은 가인이 하나님을 떠나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만든 곳, 인간이 자신을 위해 만든 장소이다. 가인은 여호와께서 죄를 다스리라고 말씀하셨을 때 듣지 않았고, 사람들이 가인을 죽이지 못하게 한다는 말씀도 믿지 않았다. 가인이 하나님의 약속을 어기고 자신의 안전을 도모한 결과 <도시>가 생겼다.

에녹은 시작또는 개벽을 뜻한다. 가인은 새로운 세계를 시작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신 시작과는 다른, 자기 아들의 이름으로 부르는 도시를 시작했다. 도시는 에녹의 의도에 걸맞은 역할을 했다. 사람들을 불러 모아, 사람들이 하나님 없이도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공간을 만들었다. 바벨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났다. 도시를 세운 사람들은 자기들의 이름을 내려고 바벨 탑을 세웠다.

하나님은 땅에 충만(1:22, 1:28, 9:1, 9:7에서는 편만’)하라 하셨다. 땅에 충만하려면 흩어져야 한다. 도시는 사람들이 모여야 만들어진다. , 땅에 충만하라는 하나님 말씀에 반대해야 도시가 이루어진다. 도시는 하나님의 저주에 대한 인간의 반응이다. 인간은 자기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막으려 했다. 가인이 그랬고, 시날에 모인 사람들도 그랬다. 그곳에 니므롯이 등장한다.

니므롯, 시날의 역사

노아 이후에 사람들이 동방으로 옮겨가다가 시날 평지에 정착했다. 시날은 강포함과 포악 위에 세워진 도시다. 바벨탑이 세워진 곳이 시날(11)이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을 잡아간 무리의 우두머리는 시날(14:1) 왕이었다. 아간의 범죄를 일으킨 물건도 시날 산 외투(7:21)였다. 느부갓네살이 하나님의 성전 물품을 가져다가 자기 신을 섬기는데 두었던 곳도 시날(1:2)이었다. 이때 다니엘은 바벨론이란 이름 대신 일부러 시날이라고 썼다.

세상의 첫 장사로 알려진 니므롯의 나라가 시날 땅(10:10)에서 시작한다. 시날은 시대를 이끌고 지배하는 정신을 나타낸다. 힘과 권력, 돋보이는 능력, 사람들이 따르는 넓은 길을 보여준다. 시날에 도시를 세우고 이웃 나라를 공격한 사람들은 모두 가인의 자손이다. 놋 땅에 도시를 만든 가인과 에녹 성주의 후손이 제국을 세우고 예루살렘을 무너뜨렸다. 이스라엘은 시날(바벨론)에서 포로로 살았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유리하는(26:5)’ 백성, 도시와 상관없는 유랑민으로 정하셨다. 하나님의 백성은 한곳에 모여 힘을 기르고 제국을 이루어 힘을 과시하지 않는다. 교회에서 돈을 내세워 일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제국을 원하셨다면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에 나라를 세웠을 것이다. 아브라함은 문명의 중심지에 발달한 도시 갈대아 우르를 떠나야 했다. 이집트에 내려갔으나 다시 돌아와야 했다. 이스라엘은 두 제국 사이에 끼인 땅 가나안에서 시작했다. 그곳은 전쟁에서 한 번도 지지 않았던 다윗을 제국의 황제로 만들지 못하는 땅이었다.

성전은 모였다가 다시 삶의 자리로 흩어지게 하는 구심점이 되어야 한다. 성전에 모일 때도 우리는 중심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죄인이다.’를 생각하고 이스라엘 곳곳으로 다시 돌아가야 했다. 우리는 흩어져야 하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모여들어 힘을 과시하려는 인간의 욕망은 성전조차 구심점으로 삼아버렸다. 예루살렘 성전은 하나님의 영광을 구석구석까지 보여주는 출발점이 아니라 국가주의에 빠진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가 돼버렸다. 하나님 없이 사는 영웅(니므롯)이 세운 도시(시날, 바벨론)에서 일어난 일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인 사람들 사이에서도 일어났다.

예수님은 니므롯과 반대 모습으로 사셨다. 시골에서 태어나,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서 사셨다. 가난하고, 온유하고, 의를 위하여 핍박받으라 하셨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성을 쌓고 도시를 이루는 정신과 거리가 멀다. 아무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워진 성전이라 해도 스스로 중심에 둔다면 하나님께서 무너뜨릴 수밖에 없었다. 성전이 무너진 곳에 사람들은 교회를 세웠고, 교회에 사람들이 모이자 또 니므롯이 등장했다.

도시의 의미 (※ 자크 엘룰이 쓴 『도시의 의미』를 참고하였다.)

자크 엘룰은 도시를 인간이 전능한 장소라고 썼다. 도시를 의사 불통의 장소, 하나님의 크나큰 아이러니가 숨어있는 곳이라 불렀다. 도시에서 사람들은 서로 이해하지 못한 채 지낸다. 자신을 위해 도시를 건설하지만, 자신을 위해 모인 사람들이 서로 이해하지 못한 채로 지내게 된다. 도시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반대되게 자기 나름의 정의를 세운다.

그렇다면 도시에 살지 말아야 할까? 수도권과 광역시에 거주하는(2020년 기준) 우리나라 인구의 81.4%가 흩어져야 할까? 그럴 수는 없다. 여호와께서 바벨론 제국에 포로로 잡힌 이스라엘 백성에게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읍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라(29:7)” 하셨다. 포로 된 곳에서 주인처럼 살라 하셨다. 니므롯의 자리에 앉아 부와 권력의 주인이 되는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 자녀로 주인처럼 살라 하셨다.

종은 시키는 대로 하지만, 주인은 스스로 결정한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돈을 더 벌까, 더 높아질까, 더 편하게 지낼까 물을 때 하나님의 백성은 다른 걸 묻는다. 그들이 말하는 걸 누리기 위해 질문을 잃어버리고사는 사람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사람들이 말하는 아파트, 연봉, , 대학이 아니라 하나님의 질문에 마음을 둔다. 7월호의 <세 가지 질문>을 떠올려보자.

도시는 우리를 바쁘게 한다.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잊게 만든다.

나를 찾을 여유가 있나? (네가 어디에 있느냐?)

도시는 이웃을 없앤다. 옆집, 윗집은 있어도 이웃은 사라지게 만든다.

이웃이 보이는 곳인가? (네 아우 아벨이 어디에 있느냐?)

도시에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을 결정하는 건 무엇일까? 돈 아닌가? 돈이 되는 곳에 사람들이 모인다. 우리도 돈을 위해 살아가야 하나?

무엇을 하며 살까?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세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이 여호와를 기쁘게 하면 좋겠다. 그렇지 않다면 그곳은 에녹 성이고, 놋 땅이고, 시날 땅이다. 떠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