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마를 잊자.
내게도 ‘트라우마’가 있다.
5~6학년 여자아이들과 지낼 때 방학을 손꼽아 기다렸다. 두 번이나.
1~6학년을 최소 4년씩은 했다. 4학년이 가장 잘 맞았다. 최고였다.
제자 중 교사가 된 아이가 몇 있는데 모두 4학년 아이들이다.
1, 2, 3학년을 맡았을 때는 학교에 시인들을 만나러 가는 기분이었다.
올해 6학년 담임이 되었다.
여자아이들과 어떻게 지낼지 걱정이 앞섰다. 아이들 반응을 살피는 횟수가 많아졌다.
아이들이 참 예쁘고 좋은데도, 혹시나 하는 마음이 가시지 않는다.
걱정과 두려움이 나와 아이들 사이를 희미하게 만들었다.
더구나 3월 초에 일이 많은 업무를 맡아 바빴다. 오랜만에 하는 6학년이라 수업 준비에 시간이 들었다.
아이들과 상담을 해야 하는데 자꾸 뒤로 밀렸다. 그러는 동안 머리채 잡은 싸움, 주먹질한 싸움이 벌어졌다.
아이들은 금방 화해하고 지나갔지만, 내 마음엔 흔적이 남았다.
‘더 다가가고, 사랑하려는 마음을 바짝 붙잡아야 하는데~’
‘~하는데’ 하면 뭔가 부족하다는 뜻이다.
금요일에 두 아이 집 가정방문을 했다. 한 아이는 머리채 싸움, 주먹질 싸움 둘 다에 얽혔다.
다른 아이는 위의 아이와 주먹다짐을 했다.
싸움 두 건 모두에 얽힌 아이, 왕따를 당해서 참 많이 아팠다.
엄마가 좋은 분이라 아이만 위해 이기적으로 생각하지 못했다.
아이는 담임교사도, 부모도 자기 편이 아니라고 느꼈다. 의지할 곳 없는 아이는 죽기만 바랐다고 했다.
엄마가 눈물을 글썽이며 말한다.
“아이가 아플 때 몰라줬어요. 뒤늦게 아이를 위해 살려 해요. 하지만 너무 힘들어요. 저는 누구에게 도움을 받나요?”
많이 아팠다가 회복된 남자아이 이야기를 해주며 나도 눈물이 났다.
엄마가 또 눈물을 참으며 “전 누구에게 하소연하나요?” 했다.
교회에 가서 도움을 받아보라 하려다가 참았다.
교회가 이분을 위로할지, 아니면 엉터리 희망으로 덧칠할지 몰라서다.
아이가 돌아오는 시간이 아니라면 오래도록 이야기를 들어줬을 것 같다.
엄마 이야기를 들으며 내가 만난 아이들이 생각났다.
너무 아팠던 아이들, 외로운 아이들, 허덕이며 버티던 아이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이야기를 내게 들려준 아이들!
그땐 마음이 상하고 찢어져도 아이를 위해 뛰어들었다.
그런데 지금은 약간의 트라우마 때문에 머뭇거리고 주춤했다.
이 아이와 엄마만 도움이 필요한 게 아니다. 우리 반 아이 모두 손을 내밀어 일으켜 세워야 한다.
가정방문을 마치고, 트라우마를 잊기로 했다.
주춤하다가 진짜 해야 할 일을 잊을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