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을 돌보는 참목자
어느 시대, 어떤 집단을 막론하고 지도자의 중요성은 말할 나위가 없다. 지도자의 수준은 집단의 수준을 보여준다. 부패한 지도자가 많으면 시대가 암울해진다. 종교 지도자가 부패했던 중세 시대는 당연히 암흑기였다. 부패한 왕조는 무너졌으며 무능한 지도자는 백성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과학과 첨단기술이 아무리 발달한다고 해도 지도자가 부패하면 백성은 고통 당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신을 ‘목자’로 나타내신다. 여호와는 참된 목자이고 이스라엘은 양이다. 하나님은 지도자를 선택하셔서 하나님의 백성을 맡기셨다. 그러나 이스라엘 역사에서 선한 목자보다는 악한 목자가 더 많았다. 선지자들은 양떼를 파멸의 구덩이로 몰고 가는 지도자를 꾸짖고 질책하며 ‘참된 목자이신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외쳤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내 목장의 양 떼를 멸하며 흩어지게 하는 목자에게 화 있으리라(렘 23:1) 말씀하셨다. 양을 먹이고 돌보며 풍성하게 해야 하는 이스라엘 왕과 종교 지도자들은 자기 배를 불리며 양떼를 고통에 빠뜨렸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삯꾼이었다.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요 10:12)“
목자는 고상하지 않다.
목자는 양을 돌보는 사람이다. 우리는 목자를 아침에 양떼 데리고 풀밭에 나갔다가 저녁에 우리로 데려오는 사람이라 생각한다. 초록빛 풀밭에 양떼가 한가로이 풀을 뜯고 맑은 물이 흐르는 냇가 나무 아래에서 하프를 타는 모습을 떠올린다. 이렇게 양을 돌보는 목자도 있다. 미국에선 넓은 풀밭에 울타리를 하고 양들이 자유롭게 노닌다. 목자가 편안하게 기타 치며 쉴 수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선 이렇게 하지 못한다. 이스라엘과 주변 지역에서 목자는 전혀 고상하지 않다.
유다 광야와 주변 지역에서 양과 염소를 치는 목자는 우리가 생각하는 이미지가 아니다. 우기에만 잠깐 흐르는 와디는 평소에는 말라 버린다. 비가 쏟아지면 홍수가 난 듯 물이 흐르지만 잠시뿐이다. 광야는 그야말로 광야다. 목자는 양떼를 이끌고 풀을 찾아 계속 움직인다. 푸른 초장을 찾아 떠도는 목자는 해마다 2400km를 옮겨다니기도(94쪽) 한다.
광야에는 이리와 늑대가 호시탐탐 양을 노린다. 목자는 밤에도 깨어 가축을 지켜야 한다. 울타리 없는 광야 한가운데에서 약탈자들에 맞서 싸워야 한다. 목자가 잠들면 이리와 늑대뿐만 아니라 도둑도 양을 훔쳐간다. 저자는 목자가 애써 기른 양떼를 한꺼번에 훔쳐간 이야기를 여러 차례 들려준다. 저자가 만난 80여 세 된 예멘 목자 모쉐는 도둑들이 개들을 독살하고 양떼를 세 번이나 훔쳐 갔다고 말했다.(202쪽) 그중 한 번은 250마리를 한꺼번에 도난당했다. 사법체계가 작동하는 현대사회에서도 이렇다면 성경이 쓰여지던 당시에는 얼마나 더했을까!
목자를 알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사랑하는 지도자를 ‘목자’로 설명하는 까닭을 안다. 진짜 목자가 어떤지 모르고 함부로 상상하면 잘못된 지도자상을 갖게 된다. 홀로 앞서가는 독단을 추진력과 리더십으로 착각하면 양떼는 흩어진다. 잘못된 지도자를 뽑으면 못된 짐승과 도둑이 올 때 양떼는 도적질당하고 죽고 멸망당한다(요 10:10)
목자가 되는데 필요한 자격조건은 무엇인가?
디모데 래니액은 하나님이 말하는 진짜 목자는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려고 목자를 직접 찾아 나섰다. 21세기를 이끈 지도자에게 있는 자질을 찾아 <양떼를 잘 이끄는 목자의 7가지 특징>을 말하지 않는다. 이스라엘, 요르단, 팔레스타인 주변 지역에서 베두인 목자를 만나 목자에게 필요한 자격조건을 묻는다. 양떼를 몰고 사막과 광야를 오가며 이리와 맞서고 푸른 초장을 찾아다니는 진짜 목자를 만난다.
우리는 양떼를 보지 못한다. 대관령 양떼목장이나 삼양목장에서 방목하는 양떼와 소떼를 본다고 해도 실제를 알지 못한다. 사진에 담을만한 멋진 풍경의 일부로 양떼를 보고 올 뿐이다. 저자는 광야에서 꼴을 찾아다니며 온갖 위험을 이겨내는 진짜 목자를 만난다. 그만큼 당시 문화에 충실하다. 요르단 목자 아부-자말은 목자가 되는데 가장 필요한 자격조건은 ‘목양을 위한 마음을 지니는 것’이라고 한다. 저자의 아들이 양떼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걸 보고는 모세가 그랬던 것처럼 여기(광야)에 남겨 두라고 요청한다. 자기가 양 200마리와 아내를 주겠다며(64쪽). 이야기를 들으면 모세가 이드로의 양떼를 치는 모습이 이해가 된다. 이드로는 모세에게서 ‘목양을 위한 마음’을 보았던 모양이다.
양은 시력이 나빠서 9-13m정도밖에 보지 못한다. 길을 잃으면 스스로 주인을 찾지 못한다. 불가능하다. 저자는 이런 식으로 현장 경험을 생생하게 전해준다. 광야에서 우물의 중요성을 말하고 지팡이, 막대기, 양떼를 지키는 목양견, 이름을 붙인다는 의미, 약탈자와의 맞대결, 주무시지 않는다는 의미……을 말해준다. 읽으며 ‘아, 그랬구나. 이런 뜻이구나!’ 하는 이야기가 많다.
교과서로 배우지 않고 직접 겪어내는 사람이 목자다.
저자는 실제를 경험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추위를 견디며, 굶주린 이리 떼와 싸우며, 졸음을 떨쳐내고 양떼를 지키는 목자를 생생하게 전해준다. 교회 운영 매뉴얼, 지도자 자격시험이나 지도자 양육 프로그램이 아니라 목자를 말한다. 양떼를 이끄는 원리나 지도자가 되는 비결을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목자가 어떻게 양떼를 이끄는지 읽으면서 지도자가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 깨닫게 해준다.
저자는 목자를 찾아 나섰다가 고대 암몬과 모압 지경을 나누는 산등성이 근처에서 양떼를 찾아냈다. 그때 만난 목자 아부-야스민에게 목양에 관해 배우기 원한다며 “내가 댁의 양 일부를 구입하기 원하며 그래서 양떼를 돌보는 데 알아야 할 모든 것을 가르쳐달라고 질문하면~”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아부-야스민은 저자의 질문을 이해하지 못하고 통역사와 판매 흥정을 시작했다. 저자가 자기 입장을 설명해도 목자는 저자가 무얼 원하는지 몰랐다. 이때의 깨달음을 “아부-야스민의 세계에서 사람은 목자로서 자라납니다. 베두인은 교과서를 쓰지 않습니다. 그들은 필요가 발생하는 대로, 그리고 저녁 화롯가에서 그들의 풍부한 교훈 가운데서 목양 기술을 전수합니다. 가르쳐 배우기보다는 터득하는 것입니다.(323쪽)” 라고 적었다.
양떼를 이끌고 가르는 기술은 직접 양떼를 기르면서 배운다. 이 책 역시 양떼 기르는 기술을 말하지 않는다. 박사학위를 가진 사람이 아니라 직접 양을 기르며 목자로서의 마음을 보여준 사람을 말한다. 광야에서 박사학위를 보고 목자를 선택하는 어리석은 주인은 없다. 진짜 목자는 양떼를 돌보는 모습을 통해서 자신을 증명한다. 지도자가 되는 비법이나 기술은 전혀 말하지 않지만 책을 읽으면서 ‘참된 목자가 양떼를 이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한국 교회 지도자를 생각하며 읽자.
이 책은 40개의 장(chapter)으로 되어있다. 이스라엘과 근동 지역에서 양떼를 치는 목자를 찾아다닌 저자가 목자의 모습을 통해 성경이 말하는 지도자를 보여준다. 목자 지도자는 편하고 돈 많이 벌고 박수 받는 자리가 아니라 위험을 무릅쓰고 힘겹게 일하는 사람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양을 사랑하고 함께 하는 귀한 사람이다.
각 장은 관찰-탐구-적용으로 되어있다. 현장에서 관찰한 내용을 성경에서 더 깊이 탐구하도록 이끈다. 성경이 말하는 목자의 뜻과 역할, 하나님이 원하는 목자, 선지자들을 통해 질책하는 목자의 모습……을 말한다. 정확한 관찰에서 나온 탐구내용이어서 깊이 다가온다. 현실을 바르게 이해하고 말씀을 탐구한 뒤에 적용을 실천으로 이어간다. 당장 무엇을 하자는 내용은 아니다. 목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목양을 위한 마음을 지니는 것’이라고 말한 것과 마찬가지로 행동이 아니라 마음을 움직이는 내용이다. 현장에서 직접 찍은 사진도 참 좋다.
한국 교회 지도자는 광야에서 진짜 양떼를 이끄는 목자를 닮지 않았다. 그럼 책을 읽으며 한국교회 지도자를 비판하거나 한탄만 해야 할까? 저자는 목자를 담임목사로 한정하지 않는다. 목사, 전도사, 사역팀장에게 멋진 지도자가 되라는 말은 전혀 없다. 우리 모두 목자의 마음을 알라고,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 돌보신다는 걸 알려주려고 하지 않았을까! 또한 우리가 누군가를 목자의 마음으로 돌보고 사랑하라고 책을 쓰지 않았을까! 그렇지만 책을 읽으며 한국 교회 지도자가 이런 모습이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