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돌려드립니다 1. 지식의 나무
※ 2008년 3월호부터 13년 동안 좋은교사에 책 소개를 했다. 이제 그만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책 소개 대신 하나님 말씀을 나누고 싶었다. 2021년 좋은교사 1월호에 낸 첫 번째 글을 올립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세기 2:9)
1. 생명 나무 : the tree of life
2. 선악과 :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우리 학교 6학년 아이 부모가 닭을 17만 마리 키웁니다. 글 쓸 게 없다는 아이에게 17만 마리의 닭이 어떻게 사는지 보면 저절로 글이 나올 거라 했습니다. 가로, 세로 1m 안 되는 철장 안에 거의 열 마리나 되는 닭이 갇혀서 알만 낳습니다. 움직이지 못하니 스트레스를 받아 서로 쪼아댑니다. 털이 뽑히고 피가 납니다. 그래도 달걀 개수만 많으면 주인이 좋아합니다. 우린 그렇게 만들어진 달걀을 먹습니다. 아이에게 물었죠.
“시간이 지나 닭이 달걀을 낳지 못하면 어떻게 해?”
자연 상태에서 닭은 15년 정도 삽니다. 닭장에 갇힌 닭은 보통 1년 지나면 알을 잘 낳지 않습니다.
“기계에 갈아서 비료로 만들어요.”
아이 표정에 변화가 없습니다. 15년 사는 닭이 일 년 동안 알을 낳고는 기계에 갈려 버립니다. 부모님이 양계장을 하시니, 아이 눈에는 닭이 생명체로 보이지 않나 봅니다. 아이가 아는 지식이 무얼 하나요? 생명을 주나요? 생명을 귀하게 여기나요?
에덴동산에 두 나무가 있었어요. 동산에 있는 수많은 나무와 달랐지요. 두 나무에는 이름이 있었어요. 생명 나무와 선악과! 생명 나무가 생명의 나무인데 선악과는 ‘선악의 나무’가 아니라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입니다. 두 나무는 ‘지식’이 있고 없음이 달라요. 어떤 지식일까요?
선악과는 자기 생각으로 선과 악을 판단하게 하는 나무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자기 손으로 선악과를 따먹고 스스로 판단하는 지식이 생겼습니다. 지식으로 무얼 할까요? 하와가 말합니다.
“뱀이 저를 속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열매를 먹었습니다.”
하와에게 생긴 지식은, 뱀이 속였다는 사실을 알게 했습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뱀에게 죄를 덮어씌우는 생각을 만들었습니다. <자기 보호와 거짓말!> 익숙하지 않나요? 아담도 지식을 똑같이 사용합니다. 자기를 위해서 죄를 하와에게 떠넘깁니다. 지식은 하와와 아담을 보호하지 못했습니다.
지식이 넘치는 시대
신자유주의의 파도가 우리나라를 휩쓸고 10년이 지났습니다. 신자유주의는 경쟁에서 이기는 것을 칭송합니다. 성공하고 승리해야 선이라 생각하게 만듭니다. 성공하려면 능력이 있어야 하고, 능력을 갖추려면 성적, 스펙, 외모 등을 가져야 하지요. 이런 사회에서는 쉬지 못합니다. 능력 사회는 곧 피로 사회입니다.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기보다 배우고 또 배우고 또 배워야 한다고 밀어붙입니다. 안정된 직장에 다니는 교사도 계속 배웁니다. 신자유주의 체제 이후로 연수가 정말 많아졌습니다. 교사들이 쫓기듯 연수에 참여합니다. 코로나로 만나지 못하는 처지에서도 연수가 끊이지 않습니다. 지식을 쌓고 또 쌓으면 잘 살까요?
“항상 배우나 끝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디모데후서 3:7)
배우고 또 배우는데 왜 진리의 지식에 이르지 못할까요? 디모데후서 3장을 살펴봅시다. 1절 말세에 고통하는 때에 2절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쾌락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합니다. 5절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이 없습니다. 6절 욕심에 끌린 사람을 예로 들며 이들이 항상 배우나 끝내 진리의 지식에 이르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배우고 또 배워도 진리의 지식을 깨닫지 못하는 까닭은 죄를 지으면서도 죄를 짓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더 배워서 욕심을 이루겠다는 바탕 자체를 바꾸어야 합니다. 지식의 총량을 늘이는 게 핵심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생명 나무는 지식의 총량과 상관이 없습니다.
다니엘이 본 환상을 마무리하며 마지막으로 씁니다.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다니엘서 12장 4절)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에 쓰인 바로 그 낱말입니다. 마지막 때에 지식이 많아진답니다. 이 말씀대로 되었습니다. 지금은 지식이 너무 많아져서 도무지 감당하기 어려운 시대입니다. 이 사람, 저 사람이 모두 자기만의 지식을 갖고 자기를 위해 지식을 활용합니다. 심지어 하나님 말씀도 자신을 위해 씁니다. 그래서 우리가 생명을 누리나요?
우리를 보호하지 못하는 지식
우리가 아는 지식이 우리와 이웃을 보호합니까? 우리는 자신을 위해 지식을 이용합니다. 일부만 골라내어 전체를 왜곡해서라도 자기를 만족시킵니다. 기자나 정치인에게만 해당하는 내용이 아닙니다. 우리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온 땅을 우리에게 주시며 다스리라 하셨는데 하와는 뱀을 다스리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지키시는데 도대체 무엇으로부터 보호하려고 뱀의 말을 들었을까요? 뱀이 얼마나 지켜줄까요? 소용없다는 걸 몰랐을까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가장 먼저 한 일은 ‘나뭇잎으로 몸을 가린’ 행동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지식을 가진 순간, 그들은 스스로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기들 외에 무엇이 그들을 해한다고 생각했을까요? 옷을 만들어 가린다고 얼마나 가려질까요? 겨우 하루만이라도 지켜줄까요?
아이들이 학교에서 거짓말을 합니다. 왜 그렇죠?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죠? 아이들은 자기를 보호할 필요가 없다는 걸 몰라서 엉터리 지식, 거짓 지식을 내밉니다. 본능적으로 자기를 보호하려 합니다. 자기 보호는 결코 자신을 보호하지 못합니다. 우리도 거짓말을 합니다. 아이들보다 더 교묘하게 하거나 뻔뻔하게 하죠. 자기 보호는 이웃을 비난하게 만듭니다. 거짓에 거짓을 쌓습니다. 자기 보호에 빠지면 자기가 정말 옳다고 생각합니다.
‘뱀이 속여서 그랬어요. 뱀을 만든 사람은 제가 아니죠.’
하와가 자신에게 유리한 지식을 선택해서 하나님께 내밉니다. 이 지식이 하와를 구원합니까? 이 말은 누굴 비난합니까? 아담은 다릅니까? ‘하나님이 주신 여자 때문에 이렇게 됐어요.’ 아담도 자기에게 유리한 사실을 고릅니다. 이 지식은 누구를 비난합니까? “하나님, 왜 이러세요? 왜 이런 일이 제게 일어난 거죠?”는 누구를 비난합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일을 일어나게 하신다면, 당신을 예배해야 하는지 생각 좀 해보겠습니다. 하는 태도 아닌가요?
사람들이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는 대신 자신에게 유리한 지식을 내세우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마음을 잃어버리고 죄악에 사로잡힙니다. 그때부터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데 주력합니다. 이미 공동체는 깨지고 있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에덴 공동체만 깨진 게 아닙니다. 피조물과 하나 되기 원했던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공동체도 깨졌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자기 보호를 위해 선악과를 사용한 순간, 인류는 서로에게 해를 끼칠 수 있다는 걸 알아냈습니다. 자기방어야말로 그들의 우선 관심사였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자기를 보호하는 도구가 되는 순간, 신뢰는 사라져버렸습니다. 자기를 보호하는 대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기억했어야죠. 아쉬울 것 하나 없지만, 우리를 만드시고 함께 거닐기 원하는 분이 곁에 계심을 기억해야죠. 신뢰가 깨지면 책임지지 않습니다. 서로를 위해 희생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희생양을 찾아다니죠. 때론 학생, 때론 교사, 때론 교장, 때론 하나님에게 비난을 돌립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망가뜨려서라도 자기를 지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어린양이 세상 죄를 지어야 했습니다.